검색결과
-
케이(K)-콘텐츠 탄생 숨은 주역, 대중문화예술 제작진 대상 시상식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콘텐츠진흥원(원장 조현래, 이하 콘진원)과 함께 16일 오후, 스탠포드호텔코리아(서울 마포구)에서 ‘2023 대중문화예술 제작스태프 대상’ 시상식을 열어 케이(K)-콘텐츠를 세계에 우뚝 서게 만든 제작진의 노고를 격려한다. 올해로 7회를 맞이한 ‘대중문화예술 제작스태프 대상’은 대중문화예술산업 발전에 이바지한 제작진을 격려하는 국내 유일의 정부 포상 제도이다. 영화·방송·대중음악 분야에서 활약한 제작진을 대상으로 문체부 장관 표창 6명, 콘진원장상 13명 수여 문체부와 콘진원은 올해 수상자를 선정하기 위해 지난 4월 영화, 방송, 대중음악(뮤지컬 포함) 분야의 촬영, 조명, 특수효과, 편집, 의상, 무대, 음향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제작진을 대상으로 일반 공모를 진행했으며, 그 결과 후보자 총 60명을 추천받았다. 이후 관련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문체부 장관 표창 6명, 콘진원장상 13명 등 수상자 19명을 최종 선정했다. 문체부장관 표창 : 6명 장르 수상자 소속 직위 세부분야 방송 김종욱 한국방송공사(KBS) 연구위원 미술/뉴미디어 김성미 - 촬영감독 촬영 권태은 - 음악감독 음악 영화 김윤수 (사)한국영화촬영감독협회 촬영감독 촬영 대중 음악 김미경 ㈜미소컴퍼니 대표 기술 김영일 ㈜트라이스타오디오 대표 음향 문체부 장관 표창은 ▴‘방탄소년단 월드투어’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예술인들과의 협업을 통해 케이팝을 세계에 알리는 데 이바지한 ㈜트라이스타오디오 김영일 대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맨 오브 라만차> 등 유수의 작품에서 기술감독으로 활약한 ㈜미소컴퍼니 김미경 대표, ▴예능 <팬텀싱어>, <싱어게인> 등 60여 편이 넘는 프로그램의 음악을 연출해 깊이 있는 무대를 보여준 권태은 음악감독, ▴<울지마, 톤즈>, <다큐멘터리 3일> 등에서 험지를 누비며 생생한 기록을 카메라로 담아낸 김성미 촬영감독, ▴30여 년간 방송영상 디자인, 브랜드 아이덴티티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인 한국방송공사(KBS) 김종욱 연구위원, ▴영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여타짜> 등으로 수준 높은 촬영 기술과 실력을 인정받은 (사)한국영화촬영감독협회 김윤수 촬영감독이 받는다. 콘진원장상은 ▴뽀엣드로 도연 대표(의상), ▴그리드포인트 이정기 대표(조명), ▴노병우 무대감독(무대예술), ▴서숙진 무대 디자이너(무대예술), ▴더 그립 정훈 감독(특수장비촬영), ▴(사)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최정화 대표(제작/프로듀서), ▴(사)한국영화조명감독협회 남진아 촬영/조명감독(촬영/조명), ▴㈜브라보픽쳐스 안계현 촬영감독(촬영), ▴에스비에스에이앤티(SBS A&T) 소은석 브이엑프엑스(VFX) 슈퍼바이저(VFX 컴퓨터그래픽), ▴한국교육방송공사(EBS) 노은주 차장(미술/무대예술), ▴문화방송(MBC) 기정모 디아이(DI) 컬러리스트(색보정), ▴안익수 음향효과감독(음향효과), ▴정종훈 미술감독(무대예술)이 받는다. 문체부 윤양수 콘텐츠정책국장은 "대중문화예술 제작진은 화려한 무대 뒤에서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땀 흘리며 우리 대중문화예술산업의 발전을 이루어 온 숨은 주역”이라며, "앞으로도 세계를 놀라게 할 창작물과 새로운 성취를 기대하겠다.”라고 밝혔다.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77)김종욱 소화 5년경에 이르러 단성사의 흥행주 고 박승필씨는 개인적 사업으로 인해서 경제적 파탄을 가져왔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가 과거에 남긴 예원에 있어서의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할 것이 못된다. 즉 전회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김도산일행을 비롯하여 ‘취성좌(聚星座)’, ‘연극사(硏劇舍)’ ''신무대(新舞臺) 등을 스스로 조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연극에만 치중하지 않았고 한 걸음 나아가서 영화제작에까지 능동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기에 분망(奔忙)하였다. 고 나운규(羅雲奎)군의 제작 영화가 십중팔구는 이 단성사의 기획과 진행 아래서 실천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고 박승필 씨의 후일에 남겨놓은 공적을 우리는 다시금 감사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아리랑’, ‘벙어리 삼룡이’ 등 고 나운규군의 걸작을 얼마든지 들 수 있는 반면에 그로 하여금 그렇게 만든 말하자면 배후의 힘인 박승필씨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한번 넘어가기 시작한 나무는 아무러한 힘을 다해도 붙드는 재주가 없었다. 이리하여 단성사는 소화 5년에 이르러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니 그가 곧 지금까지 내려온 박정현(朴晶鉉)씨였다. 물론 단성사가 박정현씨에게로 넘어오게 된 내용에는 첫째 박승필씨가 작고(作故)를 한 절대적 사실이 원인하였고 다음은 전 주인 박승필씨가 일조(一朝)에 없어지자 남은 관원 전부부터 추천을 받아서 새로이 준비하여논 주인의 자리로 올라서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박승필씨가 그때까지 생존하였었다 할 것 같으면 아무리 경제적으로 대 난국에 처하였였다 할 것 같으면 아무리 경제적으로 대 난국에 처하였었다 할지라도 그 기세 그 포부를 가지고 결코 그냥 퇴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흘러간 무대 ‘단성사’ 만이 아는 일이거니 이곳에 중언부언(重言復言) 이야기해서 무엇 하랴. 박승필씨로부터 박정현씨에게로 넘어오자 단성사는 관원 스물 세 사람으로 새로운 경영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니 즉 이들 중의 중요간부의 이름을 열거(列擧)하면 대표에 박정현, 서무(庶務)와 선전(宣傳)에 이구영(李龜永), 악장(樂長)에 서룡운(徐龍雲), 해설 주임에 김덕경(金悳經) 등 제씨를 비롯하여 최병룡(崔炳龍), 서상필(徐相弼), 이병조(李丙祚), 류희성(柳熙成) 등 제씨였다. 이러한 조직과 형태를 가지고 단성사의 스물 셋이나 되는 종업원들은 소화 10년까지 그야말로 한번도 월급다운 월급을 타보지 못하고 오로지 경성의 무대 ‘단성사’를 위해서 헌신적 노력을 거듭하여왔던 것이다. 그러자 소화 10년 5월 10일에 단성사는 신축(新築)이 되었던 것이니, 그때부터 집세도 매월 천원씩으로 올라가게 됐고 흥행도 매우 성적이 좋아서 명치좌나 혹은 약초극장에게 떨어지지 않았다. 조선 영화 상설관으로서 처음으로 낮 흥행을 시험한 곳도 이 단성사 무대였고 또한 처음으로 하루 3회씩의 흥행을 시험한 곳도 이곳 단성사였다. 그러나 단성사도 운(運)이 진(盡)하였던지 소화 12년(1937년)에 이르러 박정현 씨 하나만 남겨놓고 이하 스물 두 사람은 일제히 탈퇴를 하고 말았던 것이니 거기에 대한 자세한 내막(內幕)은 이곳에 쓰기를 피하거니와 오늘에 다닥친 결과를 직면(直面)할 때 박정현씨의 개인적 사정이 너무나 그로하여금 과중(過重)한 부담을 지게 하였던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소화 12년(1937년) 관원 전부가 탈퇴할 때 마지막으로 봉절(封切)한 영화는 "잃어버린 지평선(地平線)”이었다. 그 후부터 과연 ‘단성사’는 잃어버린 지평선으로 오로지 전락(顚落)의 걸음을 떼어놓기에 분주하였던 것이다. 관주 전촌(田村)씨의 미망인(未亡人)으로부터 집을 내놓아달라는 독촉을 받은 것은 올 정월이고 그리고 명치좌 주인 석교(石橋)씨에게로 3만 9천원에 넘어간 것이 바로 올 2월경이라 하니 과연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파란중첩(波瀾重疊)한 ‘단성사’의 일대기를 그 누가 눈물 없이 그릴 수 있으랴? 말할 수 있으랴? 오늘의 대륙극장의 새로운 간판을 바라보는 이 그 누가 흘러간 이름 ‘단성사’를 생각지 않을까 보냐. =< 朝鮮日報 >1939년 7월 19, 20, 21, 22일 =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76)김종욱 무성영화로서 단성사는 흥행적으로 또는 경리적으로 얼마만큼 성공은 하였으나 그러나 점차로 떨어져가려는 ‘팬’을 잡기 위해서는 언제까지나 무성, 혹은 연속영화만을 계속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서 흥행적 타산에 영민한 고 박승필씨는 마침내 신파극단을 조직하였으니 이것이 곧 ‘김도산일행(金陶山一行)’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제적 배경은 물론 ‘단성사’였으나 ‘김도산일행’은 내용에 있어서 혹은 형식에 있어서 완전한 자치제(自治制)였고 직접 박승필씨로부터는 간섭을 받지 않았다. 이상과 같이 ‘김도산일행’이 결성된 것은 대정 8년(1919년) 전후였고 중요한 멤버로서는 단장 김도산씨를 비롯하여 이경환(李景煥), 송해천(宋海天), 나효진(羅孝鎭) 등 제군이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키노드라마’가 시험된 것도 이 김도산일행이었고 또한 이것을 일반 ‘팬’에게 소개한 곳도 ‘단성사’의 무대라는 것을 돌이켜 생각하여 볼 때 다시금 흘러간 이름 ‘단성사’가 스스로 그리워짐을 어찌할 수 없다. 무성영화로서 단성사는 흥행적으로 또는 경리적으로 얼마만큼 성공은 하였으나 그러나 점차로 떨어져가려는 ‘팬’을 잡기 위해서는 언제까지나 무성 혹은 연속영화만을 계속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서 흥행적 타산에 영민한 김도산일행의 결성(結成)을 하나의 계기로 해서 이로부터 단성사의 무대에는 그야말로 우후죽순(雨後竹筍)의 기세로서 신파극단의 새로운 깃빨이 펄럭이게 되었던 것이니 즉 ‘취성좌(聚星座)’가 그것이었고 ‘연극사(硏劇舍)’가 그것이었고 ‘신무대(新舞臺)’가 그것이었다. 이같이 신파극단이 맹렬한 기세로 일어났음에는 물론 이론적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당시에 일반사회에 미증유(未曾有)의 호 경기를 가져온 공진회(共進會)의 영향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와 같이 영화 상설관시대로부터 신파 상설관시대로 머리를 돌이킨 단성사는 결코 경리 상 손해를 모르고 꾸준히 유지하여 내려왔던 것이나 소화(昭和) 5년(1930년) 경에 이르러 드디어 박승필씨는 경제적 곤경에 빠지게 되었고 따라서 단성사의 무대로 하여금 경제적 대파탄의 구렁텅이로 휩쓸어 넣고 말았던 것이니 그것은 오로지 흥행주 고 박승필씨의 극장을 떠나서의 개인의 사사로운 실패로부터 원인된 비극이었다.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74)김종욱 흘러간 이름 『團成社』, 劇壇 四十年史 無言의 主人公 = 歷史 오랜 ‘團成社’ 終焉! ‘大陸劇場’으로 遂 改名, 새 主人맞아서 不遠에 開舘豫定= 40여년이란 오랜 역사를 기진 북촌(北村)의 유수한 영화와 연극의 전당(殿堂) 단성사가 드디어 경영곤란으로 명치좌(明治座) 관주(舘主) 석교(石橋)씨에게로 넘어가서 지난 7월 1일부터 10일까지 열흘 동안 일반으로부터 단성사의 새 이름을 현상을 내걸고 모집하였던바 드디어 지난 18일 정오에 추첨으로 새 이름을 결정하고 이제부터는 오로지 개관 날짜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한다. 전 조선 각지로부터 들어온 투표 총수는 2만 4천여표로서 ‘종로좌(鍾路座)’ 혹은 ‘제이 명치좌(第二 明治座)’ 등의 각색각양의 명칭이 많았으나 결국 ‘대륙극장(大陸劇場}’이라 결정하고 경관 입회하에 추첨하여 당선자를 정하였는데 주소와 씨명은 아래와 같으며 심금은 50원이라 한다. ᅀ 경원선(京元線) 연천역(蓮川驛) 전(前) 박용신(朴龍信) (사진은 단성사) = 布張두른 ‘바락크 속 豪然! 舊派의 總本營 再轉하여 映畵常設舘으로 = 단성사! 단성사! 이제는 다시 두 번 부를 바이없는 "단성사”는 과연 여직껏 어떠한 굽이굽이의 고개를 넘어 왔는고? 북촌(北村)의 영화상설관으로 사십여 년이란 짧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내려온 말 없는 "단성사”의 흘러간 과거의 슬프고도 그리운 역사를 ‘워너‘ 영화배급소 아구영(李龜永)씨에게 듣기로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14년 전 당시의 서울에는 원각사(圓覺社)니 장안사(長安社)니 연흥사(演興社)니 하는 등의 극장이 있었다. 이러한 극장들이 있을 때 역시 지금 자리에 "단성사”기 있었던 것이디. 단성사가 처음 탄생하게 된 것은 역시 그것은 우리들의 손이어서 단 두 사람의 합동 경영이었다. 이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들 최초의 경영자는 극장을 경영하여 나아감에 우선 영리보다도 무엇보다도 자기들의 이상을 실현하기에 급급하였던 사실이다. 물론 당시의 "단성사”는 오늘과 같은 위풍당당한 집이 아니라 ‘바라크’식의 집이었다. 창립 당시에 있어서는 소위 구파(舊派)라고 하여서 입창(立唱)이며 좌창(坐唱)이며를 하였고 줄 타고 재주를 넘는 광대(廣大)들을 위하여 무대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단성사가 불이 붙고 또한 고 황금좌(黃金座)의 관주(舘主) 전촌(田村)씨의 손으로 넘어와서 비로소 영화상설관(映畵常設館)으로 면목을 일신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이나 된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단성사는 이 전촌(田村)씨의 소유가 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실제 경영을 모르는 전촌 씨는 불붙은 단성사를 단 3천원에 사기는 샀으나 앞으로의 운영방침이 애매하자 그 경영권을 고(故) 박승필(朴承弼)씨에게로 넘긴 것이다. 박승필씨와 전촌씨와는 광무대(光武臺)를 중심으로 본시부터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매월 650원씩의 집세를 내기로 하고 박승필씨는 흥행권을 맡고 전촌씨는 다만 자본주로써 한 걸음 물러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대정(大正) 7년(1918년) 경이었다. 말하자면 ‘전촌’ ‘박’ 두 사람의 합자(合資)로 단성사는 유지되어 나가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3천원이란 너무나 싼 값으로 전촌씨에게로 넘어와서 비로소 상설관으로 변한 단성사는 다시금 고 박승필씨에게로 넘어가서 비로소 상설관으로서 본격적 활동을 개시한 것이었다. 당시의 영화란 물론 전부 무성(無聲)영화이었고 그 중에서도 단성사가 즐겨 상영한 것은 ‘유니버설’ 회사와 ‘파라마운트’ 회사의 작품이었다. 지금도 우리 기억에 새로운 ‘명금(名金)’은 아마 단성사가 상영한 수입 ‘명금’은 연속 영화 증에서도 너무나 유명한 영화일 것이다. 당시에는 영화가 거의 무성이고 하였으니까 거기에 따라서 유명한 변사(辯士)도 많이 나왔다. 더구나 박승필씨가 단성사를 맡게 되자 그때까지 우미관(優美舘)에 있던 유명한 변사는 모두 이곳으로 쏠리고 말았던 것이다. 즉 이병조(李丙祚), 최병룡(崔炳龍), 김덕경(金悳經), 고 서상호(徐相昊) 등 제씨였다. 그러나 극장의 펜이란 흡사히 유행을 따르는 아가씨의 마음 같아서 그들은 차차로이 연속영화 등속에서 싫증을 느끼고 차차로이 새로운 무엇을 찾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단성사가 스스로 적지 않은 지본을 던지어 신파극단을 조직한 것은 바야흐로 이 때문이었다.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73)김종욱 대조선 개국 오백 오회 기원절 축사를 팔월 십삼밀 오후 세시에 독립관에서 행하는데 국기를 높이 달고 그 아래 화초로 단장하였는데 정부 대소 관인과 여러 학도와 인민이 많이 모였으며 각국 공 령사와 신사와 부인들이 각기 예복을 갖추으고 대대이 앉았는지라 그 축사하는 절차를 보니 처음에는 배재학당 학원들이 축수가를 불러 가로대 오백여 년 우리 왕실 만세 무궁 도으소서 찬송하니 외국 부인이 악기로 율에 맞추어 병창하더라 둘째는 회장 안경수 씨가 개회하는 뜻을 연설하고 셋째는 한성판윤 이채연 씨가 학부대신 이완용씨를 대신하여 국민의 당연히 할 직무를 연설하고 넷째는 배재학당 학원들이 뮤국화 노래를 부르는데 우리나라 우리 임금 황천이 도우샤 임금과 백성이 한 가지로 만만세를 즐겨하여 태평 독립하여 보세 하니 외국 부인이 또 악기로 율에 맞추어 병창하더라 다섯째는 미국 교사 아펜셀러씨가 영어로 조선에 거류하는 외국 사람들을 대하여 각기 당연히 할 직무를 연설하며 여섯째는 의사 제이슨 씨가 조선 관민들을 대하여 진보하는 것을 연설하고 일곱째는 배재학당 학원들이 나라 사랑하는 노래를 부르니 외국 부인이 또 악기로 율에 맞추어 병창 하더라 여덟째는 전 협판 윤치호 씨가 기원절일 문제를 연설한 후에 탁지대신 심상훈 씨가 제이슨 씨와 아펜셀러 씨의 연설한 것을 감사하다고 말하더라. 다음에 다과례를 행하고 날이 저문고로 다 헤어져 돌아가더라. 무궁화 노래 一.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세 -후렴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애국하는 열심 의기 북악같이 높고 충군하는 일편단심 동해같이 깊어 三 천만인 오직 한 마음 나라 사랑하야 사농공상 귀천 없이 직분만 다하세 四 우리나라 우리 황제 황천이 도우샤 군민공락 만만세에 태평 독립하세 現代에 無窮花 木槿花라고도 하였으니 목근화를 그 당시 무궁화 비슷이 발음하여오던 모양이랍니다. 이는 지금 일본에서 무궁화 즉 槿花를 ㅇㅇㅇ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도 그 당시 발음이 ‘무궁화’ 비슷이 혹은 와전되어 ‘무궁화’라고 俗鄕에서 불려 내려왔는지도 모른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槿花 즉 무궁화를 지금과 같이 無窮花라고 쓰게 되기는 극히 젊은 근대의 일이라 합니다. 아마 지금부터 이십 오륙년 전 조선에도 개화풍이 불게 되어 양인의 출입이 빈번하게 되자 그때의 선진이라고 하던 尹致昊씨등의 발의로 "우리 대한에도 國歌가 있어야 된다”고 한편으로 洋樂隊도 세우고 한편으로 국가도 창작(?)할 때 태어난 "上帝가 우리 皇上 도우사 海屋주를 山같이 쌓으소서 ㅇ이 寶ㅇ에 떨치사 億千萬歲에 永遠無窮하소서" 라는 노래의 부속되어 있었다고 하는(?) "東海물과 白頭山이 마르고 닳도록 ”이라는 愛國歌의 후렴인 "無窮花三千里 華麗江山” 이라는 구절이 끼일 때에 비로소 槿花 즉 무궁화를 ‘無窮花’라고 쓰기 시작한 듯 하답니다. 國歌짓고 國花 그리고 이와 전후하여 島山 安昌浩선생들이 맹렬히 민족운동 國粹運動을 일으킬 때에 조선을 무궁화에 비겨 청산 같은 웅변을 현하같이 토할 때마다 ‘우리 무궁화동산은...’ 하고는 주먹이 깨어질 듯이 책상을 두드리고 연단이 부서질 듯 벌을 굴렸습니다. 아마 이러한 자극과 동기가 근화가 무궁화로 변하여 그때에 국민이라고 하던 사람의 귀에 익어지고 입에 오른 듯합니다. 어쨌든 이때를 전후하여 근화를 무궁화라고 뚜렷이 쓰기 시작하고 또한 이것으로써 조선의 國花를 만든 듯합니다. 그러나 ‘無窮花’라는 字를 쓴 동기는 순전히 보기 좋고 뜻 깊게 하노라고 쓴 것이지요. 一時는 ‘李花’로 槿花 즉 무궁화가 위에 기록한 바와 같이 그때에 비로소 국화가 되었다 하여 국민의 숭상을 벋았다는 것은 아니외다. 먼저 쓴 바와 같이 이전 오백년 전 옛날부터 조선 나라에는 槿花가 많아 저 중국 사람의 눈에도 "君子之國은 多 木槿之擧”로 보였고 또한 그보다도 좀 늦어서 ‘海東繹史’에 고려시대에 중국에 글을 보낼 때에 고려를 槿花鄕이라고 自稱하였으니 근화가 古來로 개전에 많았던 것은 사실이 증명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근화에 대한 기록이 조금도 남지를 않았으니 이는 李 太祖가 조선을 얻은 후에 李花를 숭상하는 뜻으로 나라의 자랑거리요 백성이 다 같이 숭상하던 근화를 배척한 듯 하외다. 그래서 그간 근화가 사람의 눈에서 멀어졌던 것이겠지요.
-
제9화 ‘문경새재’도 아리랑?삼목 作 "선생님, 제가 보낸 카톡 사진 보셨어요? 점촌 버스터미널 사거리에 걸린 프랭카드인데요, 내일 강연 안내인데, 아리랑연합회 김** 선생 문경에 온다는 내용만 있어요. 아리랑 강연 내용은 없고요. 점촌 시내 곳곳, 문경읍 면 단위에는 200개나 부쳤다고 합니다. 재밌네요.” 문경시가 주최하는 시민 대상 아리랑 특강 안내 프랭카드. 내용이 아리랑을 강의한다는 내용이 아니라 아리랑 연합회 김**가 문경에 온다는 식의 표현이라서 어색하고 재미있다고 기찬숙 선생이 알려온 것이다. 이 시기 문경아리랑은 물론 아리랑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부족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20012년 6월이다. 문경새재아리랑이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한 강연이었다. 강연 주제는 아는 이들이라면 센세이션을 일으킬만한 내용이다. 70분간의 강연은 다음의 세 문장으로 요약이 된다. "모든 아리랑의 후렴에 나오는 ‘아리랑고개’는 바로 ‘문경새재’입니다. 문경새재가 바로 '아리랑 고개'라는 말입니다. 문경은 아리랑의 고향입니다.” 이 요지의 강연을 계기로 문경지역에서는 소위 ‘문경아리랑 붐’이 일어났다. 당시 송옥자 회장이 문경아리랑을 알려오고 있었지만, 시청과 문화원과 일반인들에게 "문경에도 아리랑이 있다”는 인식이 번지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2020년까지 문경지역에서 아리랑을 주제로 행해진 사업과 행사를 보면 그야말로 획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망하게 이뤄졌다. 정선이나 밀양 또는 진도 지역에서 20여년간 이뤄진 것들이 한 시장의 5년 임기 내에 이뤄진 것이다. 대충 추려도 이럴 정도이다. 첫째는 문경새재아리랑제‘가 대규모, 정례화, 대외 행사로 확대, 개최 둘째는 국립아리랑박물관 건립을 공식화, 국회 정책발표회, 아리랑 가사 서예 작품화 셋째는 문경새재아리랑과 다듬이 소리 브랜드화 행사(광화문 천명 다듬이 행사) 넷째는 문경시 ‘아리랑도시’ 선포 다섯째는 경복궁 중수 후의 아리랑과 문경새재아리랑의 연결고리 학술 담론화 여섯째는 헐버트 채보아리랑과의 연결, 독일 홈볼트 아카이부 독일포로 고려인 유리콜라이 아리랑 음원 전시 및 관련자 초청 행사 일곱째는 최초의 통속아리랑 H. B. 헐버트 채보 아리랑악보비 건립 여덜째는 문경시장 사할린아리랑제 동행 및 해외 연주자 초청 공연 아홉째는 민요학회 주최 문경새재아리랑 주제 학술대회 등 개최 열 번째는 전승단체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와 아리랑문화단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양립 이상의 과정에는 문경시청이라는 관官의 지나친 주도로 전승주체가 소외되는 이율배반적 상황이 10여 년간 점령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 ‘아이디어만 빼 먹는 관’이라는 구태도 구설에 올랐다. 이 중심에 삼목이 있었다. 삼목은 이 아리랑 공사公事에 스스로 "공도 있고 과도 있다.”고 평가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 기간에 드러나게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문경새재아리랑’의 존재와 그 위상이 정립 또는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즉, 문헌과 음반 기록으로 그 실체를 밝혀냈다는 사실이다. 1896년 H. B. 헐버트가 기록한 -아르랑 아르랑 아라리오/ 아르랑 얼싸 배 띄어라//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라는 대표사설은 이후 ‘구아리랑’에서부터 1926년 밀양아리랑과 '주제가 아리랑'까지 전승된다는 사실에서 역사적 의미가 담겨있다. 즉, 경복궁 중수(1865~1872)7년 기간에 문경의 새재에서 나는 특산물인 박달나무가 공사장 도구 자루로 다 베어져 나간다는 상실감을 표현한 것이고, 또한 이 새재는 경복궁 중수 기간 삼남의 부역꾼들이 반강제적으로 오가며 넘었던 고개이다. 여기에서 ‘새재’는 ‘고개’로, 고개는 ‘고난’의 상징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곧 문경새재아리랑의 존재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삼목은 1985년 헐버트 기록을 발굴, 소개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1905년 오키타 긴조(㳞田錦城)의 ‘한국의 이면韓國 裏面’ 소재 아리랑 기사, 1925년 동아일보의 ‘박달나무 민요’. 1929년 ‘개벽開闢’의 ‘문경요聞慶謠’, 1930년대 이재욱의 ‘영남민요조사자료’의 문경지역 민요자료 등을 발굴하여 존재를 밝혀냈다. 이러한 문헌 전승을 통한 문경새재아리랑의 존재 확인은 거의 삼목의 몫이었다. 한편 이 시기 더불어 거둔 성과가 또 있다. 그것은 일제시대 발매된 지역 아리랑 음반의 발굴이다. 즉, 1936년 밀리온 레코드사가 발매한 최계란 소리 ‘대구아리랑(1936년)’이 2008년에 발굴되고, 1937년 오케이레코드사가 발매한 서영신 소리 '동래아리랑(1937년)’이 2009년 발굴 되고, 같은 해 '신밀양아리랑(1936년)' 등이 신나라음반 자료실에서 발굴되었다. 이미 장소성을 부여한 강원도아리랑과 밀양아리랑과 진도아리랑이 널리 알려진 상황에서 대구와 부산의 지명 아리랑이 뒤늦게 발굴됨으로써 다른 지역의 지명 아리랑도 발굴 가능성이 있다는 기대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동안 음반 수집가들에 의해 또는 대학 연구소 음원 아카이브가 주목한 장르는 판소리 명창 음반이나 월남 이상재 선생이나 손기정 선수 같은 역사인물의 육성 음반 등이었다. 지역 아리랑에 대한 관심은 그리 두지 않았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특히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전국적인 아리랑 신드롬과 함께 지역 아리랑 음반들에 관심을 보여 발굴되었다. 이에 의해서 ‘경주’, ‘춘천’, ‘문경’ 지명의 아리랑도 음반으로 발매되었으리라는 추정을 하게 되었다. 삼목으로서는 당연한 기대였으며, 국내와 일본 및 해외의 음반 판매사의 싸이트를 주목하고, 1930, 40년대 신문 광고도 살피게 되었다. 2017년 11월 초, 제10회 문경새재아리랑제 개최를 준비하기 위해 문경을 바쁘게 오가던 시기이다. 고속버스가 충주를 거쳐 점촌을 향하는 중에 기 선생 특유의 높은 톤이 들려왔다. 기 선생이 안국동 아리랑연합회 사무국에서 일제시대 신문기사 색인 작업을 통해 ‘아리랑연표’를 작성하다 찾아낸 것이다. "포리돌 음반 광고에 ‘문경새재’라는 것이 나옵니다. 이건 분명 문경새재아리랑인 것 같아요. 왜냐면 오태석과 정남희 반주에 조앵무와 임소향이 부른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확실합니다. 분명 이건 문경아리랑 음반입니다.” 나는 문경문화원 일을 보면서도 건성이었다. 마음 한쪽은 빨리 서울에 들어가서 기록을 보고 싶어서 다. "일제강점기 문경아리랑이 음반으로 나왔다?”는 기대는 했지만, 실제 그 존재가 드러날 줄은 몰랐다. 요 몇 년 동안 추정한 것이 실제 현실로 드러난 것이니 신비하기도 했다. 급한 마음으로 서울에 돌아 온 삼목은 기 선생이 출력해 놓은 조선일보 1939년 1월 19일자 ‘포리도루 조선음반 신보’ 광고를 보았다. 분명하게 2월 신보 광고란에 ‘聞慶새재’가 들어있다. 반주자 두 분과 노래한 두 분도 분명히 나와 있다. 다만 ‘아리랑’이라는 단어가 없을뿐이다. 그러나 삼목은 확신을 했다. 여러 문헌에서 ‘아리랑’이 붙지 않은 ‘문경요’나 ‘박달나무 민요’가 모두 문경아리랑이었기 때문이다. 1949년 성경린과 장사훈이 펴낸 ‘朝鮮의 民謠’에서도 ‘聞慶새재’로 곡명을 달았는데, 그 가사는 문경새재아리랑이다. 그런데 이 광고만으로는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가지 의문을 갖게 되는데, 하나는 실제 음반이 발매되었다는 기사와는 다르게 광고 게제 일시와는 시점이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음반은 발매 되지 않고 광고만 나왔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광고만 나오고 발매는 되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70여년이 지나도록 실물이 확인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삼목과 기 선생은 이 두 가지 의문을 염두에 두고 음반을 찾기 시작했고 관련 기록을 수소문 했다. 이 과정에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매일 색인 검색을 하는 김종욱 선생에게 부탁한 결과 의미있는 자료가 왔다. 그것은 매일신보 1938년 7월 17일자와 9월 25일자 경성방송국(JODK) 국악 프로그램에서 ‘문경새재’가 송출되었음을 확인했다. 여기에 따르면 부른 이는 다르지만 같은 반주자에 의해 방송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음반 발매 여부와는 또 다르게 ‘문경새재’가 국악인들에 의해 연주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삼목과 기 선생은 광고자료와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음반 존재 가능성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발굴을 독려하는 차원에서 이를 언론에 알리고자 했다. 그러자 기 선생은 "우리가 음반을 찾고 발표해야지 이 자료만 알리면 안된다"라는 의견을 냈다. 이어 "그 음반 찾게 되면 가격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이 기사를 보고 찾았으면서도 마치 자신의 눈이 밝아서 '최초 발굴'이라고 떠들면서 찾았다는 기사를 내는 노략질을 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라고 일갈했다. 그러나 삼목으로서는 누가 찾든 빨리 음원을 확보하여 문경아리랑의 위상을 제고하고, 연구 자료화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의견을 달리했다. 드디어 2017년 11월 3일, 문경문화원 고성환 사무국장을 통해 문경매일신문과 대구매일신문에 자료를 공개했다. "문경새재아리랑 전국 확산…방송·음반 발매 기록 발견. 한민족아리랑연합회와 아리랑학회는 2일 문경새재아리랑이 1938년 7월 17일 오후 8시 KBS라디오 전신인 조선방송(JODK)에 방송됐고, 영국의 레코드사가 취입해 음반으로도 내놓았다는 당시 조선일보 기사와 광고를 비롯한 방송자료를 발견해 매일신문에 공개했다.” 기사의 말미는 이렇게 여몄다.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문경새재아리랑은 헐버트 선교사가 서양 악보로 채보하기 시작한 1890년대부터 1930년대 방송을 타고 임소향이 음반을 낸 이후인 1940년대까지 서울 경기 지역에서 널리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며 "만일 임소향이 월북하지 않았다면 문경새재아리랑은 해방 후에도 전국에서 널리 불렸을 것이다-고 했다.” 이 기사는 ‘문경새재’라는 음반명과 곡명을 아예 ‘문경새재아리랑’으로 특화, 단정하였다. ‘문경새재’는 ‘문경새재아리랑’ 또는 ‘문경아리랑’으로 특정, 검색 키워드로 제시했다는 사실에서 음반이나 기타 문헌에서 문경새재아리랑을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했다. 이 기사로 문경과 소장자들에게 전해져 반향이 컸다. 유튜브 ‘정창관의 아리랑’ 운영자 정창관 선생이 공감을 표해왔고,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이만유 회장도 "문경아리랑이 다른 지역 아리랑과 함께 중요한 위치였음을 확인시켜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도 했다. 드디어 기사의 결과가 나왔다. 존재에 대한 기사가 나간지 1년, 국악음반박물관 노재면 관장이 소장 자료를 공개했다. 광고 문안과 동일했다. "Polydor X-517-A(10386BF) 南道雜歌 梅花打鈴·聞慶세재 吳太石·丁南希·曺鸚鵡·林素香 伴奏 韓成俊·金德鎭·鄭海時” ‘南道雜歌 聞慶새재’ 불은 라밸의 폴리도루 음반, 너무나 반가운 음반이다. 그리고 2년 후 역시 노재명 관장이 가사지歌詞誌까지 발굴, 공개했다. 획기적인 발굴이다. 이로서 3절의 가사가 분명하게 밝혀졌다. "(중모리) "문경새재는 웬 고갠고 구부야 구부 구부야 눈물이 난다.아르르르르르 아르르르르르 아라리요.아리랑 장단에 노래허여 아리랑 고개 고개로 넘어가세.이 밭을 매고 저 논 갈아 양친 부모님을 봉양허세.아르르르르르 아르르르르르 아라리요.아리랑 장단에 노래허여 아리랑 고개 고개로 넘어가세.이 물을 건너고 저 산 넘어 우리 님 계신 곳을 찾어가세.아르르르르르 아르르르르르 아라리요.”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72)김종욱 조선영화로 제1회 작품 "春香傳”이 나온지가 벌써 12년 전이다. 이것을 조선영화의 제1 페이지로 친다면 조선영화는 벌써 열두 살 먹은 소년이 된 세음이다. 열두 살이면 보통학교 5학년생이다. 젖 먹을 시간은 벌써 지냈 건만은 우리는(조선영화계) 아직까지 어린애 對接을 받는다. 어린애에도 不具兒로 세상에서는 對해 준다. 曰 補償없는 事業, 이것이 우리들이 듣는 別名이요 세상이 우리들에게 주는 評價다. 이렇게까지 된 根本原因을 세상에서는 거의 우리들의 當事者들에게 돌리는 것 같다. 물론 그 책임의 일부를 우리 영화 제작자가지지 아니하려는 것은 아니다마는 책임 전부가 우리에게 있지는 않다, 이렇게까지 된 제일 중대한 원인이 商品市場이 極히 작았기 때문이다. 조선 내 常設舘이 16處요 三流 四流劇場까지 치면 舘 數가 68舘, 여기서 볼 영화는 1편이다. 돌아오는 時日이 12個月, 보통 작품으로 總收入이 3천원, 特作品으로 5, 6천원, 이것이 無聲時代에 우리들이 제작한 物件이 가지고 있던 市場이다. 이 작은 시장에서 出資主는 受入이 2, 3倍되는 利益을 얻으려는 小 興行師가 아니면 興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映畵館(돈 있고 일을 모르는)이 아니면 장난꾼들이었다. 그러므로 2, 3배에 이익을 목적하는 소 흥행사들은 3分之 1以上의 出資를 아니해줬던 것이요, 장난꾼들은 受入을 無視한 倍額이 제작비로 2回를 編成하지 못하고 亡해버렸다. 이런 出資主를 상대로 하는 사업이 사업답게 될 배도 없고 달리 外國市場으로 보낼 물건이나 있을 리도 없다. 더구나 외국영화로나 남이 高級해지는 觀客을 상대로 하는 조선영화가 必然的으로 닥쳐올 큰 문제가 오고야 말았다. 조선영화면 또 그렇겠지. ‘렛쭈’ 몇 장으로 太陽光線을 빌려서 겨우 보일 락 말락 한 畵面을 보기에 싫증이 났다. 더구나 무성영화도 아작 水準까지 끌고 가려면 千里길이나 남았는데 외국영화는 發聲이 완전히 되었다. 이 커다란 문제 잎에서 조선영화인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나 우리도 한 개의 저선영화인으로서 이에 應戰할 準備가 具備하게 되었으니 다만 勝敗는 技藝의 문제다. 外國物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물건을 만들면 외국의 시장도 우리의 시장이다. 今後에 조선영화는 ‘레푸’ 쪽으로 만들면 장난깜이 아니다. 영화로써 이 모든 形式을 具備한 물건만을 내놓을 것이다. 새 活氣를 띈 36年度의 조선영화계는 커다란 收穫이 있을 것이다. 絶望의 無抵抗에서 再生을 얻은 조선영화를 등에 지고 나갈 동무들에게 건강을 빌면서 擱筆한다. =朝鮮中央日報 1936년 1월 1일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71)김종욱 연극단, 악단을 울리는 신판 사기사건= 어떤 극단이나 악극단이 경영곤란에 빠졌을 시 이것을 에워싸고 대금학貸金學 모리배 또는 전후자 사이에 한 목 끼는 소위 중개자라는 것이 있어 앞뒤를 사기 횡착橫着하여 진지한 무대인들을 울리고 있는 사실은 지금에 비롯한 일이 아니거니와 여기에 편촉騙促되는 사건은 개중에서 가장 교묘한 방법이며 지적 악질 이것이라 할 것이다. 일작 22일 시내 영락정 모 악단에는 바야흐로 이 악질단이 원숙화 되려다가 다행히 기선機先 예민한 동 악단 대표의 돌격으로 드디어 그 수단은 미연에 발각되어 묵과할 희비극 일막을 빚어내고 말았지만 이제 그 사건의 내막을 들어보면 이러하다. 악단에는 서건 발생의 수일 전부터 "자기는 모 요로에 있는 사람인데 이번에 유동자금이 삼백만원 가량 수중에 있으니 이것은 건국을 위한 예술사업에 쓰고 싶다. 위선 귀 악단에도 50만을 투자하고 싶으니 어떤가?” 하고 찾아온 중년신사 전자영全구榮(가명)이라는 자(?)가 있었다. 이 문자그대로의 청천벽력적 예술이해 자본가의 내방을 본 동 악단에는 마침 현재 자기들 악단의 유지가 곤경에 빠지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그들은 이 감언이설에 귀를 기울여 이래 수일간 출자 수속하는데 필요타는 없는 주머니를 털어가며 응하였을 뿐 아니라 금액까지 솔선 꾸어주면서 교섭을 진행하여 왔다 한다. 이리하여 급기야 금일은 현금과 구식계약을 체결하는 22일 날 정오 악단측에서는 그제야 대표자까지 대동하여 장본인을 면대綿代하였던 바 역시 꿈같은 변설辯說을 늘어놓아 일동을 연기속에 두루 말았었는데 아무리 궐자厥者의 인상을 살펴보아도 틀림없이 이것은 사기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직각한 대표자는 즉석에서 이 불한당의 이면피二面皮를 보기 좋게 벗겨놓았다는 것이다. 그는 벌써 이 악단뿐이 아니라 다른 극단에 까지 이런 수단으로 공짜 향응, 또는 여우를 농락하는 등으로 유유히 무대인들을 속여 온 사실이 있었다 한다. 더욱 현금 우리 무대예술계의 운영유지가 혼미에 빠지고 있는 이즈음을 틈타서 이 같은 극히 지능적인 악덕 사기배들이 또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 출현할지 예상할 수 없으므로 모름지기 여러 단체들은 특히 조심이 필요하리라는 동단 대표의 체험 권고. (藝術通信 271호. 1946년 8월 24일) =극장= 이번엔 흥행주의 수입을 내사, ‘재산관리처’ 주목되는 움직임-적산극장 문제: 국립극장 문제를 에워싸고 합동통신사의 공동 경영설의 대두로 바야흐로 적산극장 문제의 귀추가 자못 주목되는 이 즈음 23일 오전 경기도 재산관리처에서는 돌연 시내 각 영화배급업자를 역방하고 각 극장으로부터 수입한 보율금액(단가를 포함한)의 내사를 시작하였다 한다. 이것은 혹 이즈음 항간 풍설에 떠도는 적산 관리극장의 경리부정에 대처한 확증수집인 듯이도 보이며 또는 앞으로의 낙찰 시과 그 운영에 수지가 맞을 것인가 아닌가의 기본적 수자의 산출을 보려고 하는 것인지 좌우간 현금 미묘한 예계에 적지 않은 쇼크를 던지고 있다.(藝術通信 271호. 1946년 8월 24일)
-
제8화 시노부 준뻬이 ‘아라란アララン’삼목 作 1984년 들어 삼목은 한국잡지협회 협회보 기자로 요란스럽게 살 때다. 언론 분야와 국학분야 학술세미나 참가, 전국 헌 책방 순례와 아리랑 기행, 매달 20일 전후에는 협회보 편집, 출간을 위해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날밤을 새우기 일수였다. 헌 책방 순례 목적은 잡지 창간호와 발행인과 편집인 관련 자료, 그리고 아리랑 자료 수집을 위해서다. 이때 일간지에 발굴 자료를 공개하고 협회보에 ‘한국잡지인 열전’을 연재하기도 했다. 2월 초, 동경한국연구원東京韓國硏究院에서 전화를 받았다. 최서면 원장의 배려로 일본 진보초 고서점에 삼목이 찾는 책이 입수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온 것이다. 지난 연말 최서면 원장과의 통화에서 ‘코리아 레포지토리’에 헐버트가 쓴 아리랑에 관한 논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구입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한 후 3개월만에 연락을 받은 것이다. 일본 중년 여성의 정중한 톤의 서툰 우리말이 수화기로 넘어왔다. "최원장님께서 전하랍니다. 진보초 키타자와 서점에서 연락이 왔는데, 연갑선생이 최원장님께 구입을 부탁한 코리아 레포지토리 1896년과 97년 2년분이 입수되었다고 합니다. 직접 구입를 하신다면 연락처를 드리겠고, 아니면 저에게 연락을 주시면 대행해 드리겠습니다. 가격은 2년치 합본임으로 고가입니다.” 너무나 기뻤다. 당장 어떻게 하겠다는 말은 하지는 않고 바로 연락을 하겠다고만 했다. 수화기를 놓자마자 지난 해 말 최원장과의 통화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1896년 헐버트씨가 코리아 레포지토리에 아리랑에 관한 글을 발표했는데, 구입 기회를 놓쳐서 연구원이 갖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자세히는 기억이 없네만. 분명한 것은 아리랑 악보하고 가사 둬 페이지가 있었네. 구입하겠다면 내가 아는 서점에 주문을 해놓겠네. 1896년 2월호 아니면 3월호일 걸세” 그동안 최 원장이 방송과 신문에 발표한 발굴 자료를 보면 주로 독도 영유권 문제, 안중근 의사 기록과 유묵 존제, 독립운동 관련 사료이지만,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특수 자료를 일본은 물론 미국 등에서 구입 한 장서가 2만여 권으로 알려졌다. 이런 분이 허튼 소식을 전할 리가 없으니 이것은 분명 획기적인 아리랑 문헌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부터 이 번 전화를 받기 까지 삼목은 틈만 나며 이런 생각으로 혼자 미소를 띠기 일 수였다. "악보가 있다? 분명 아리랑 악보가 포함된 최고最古의 문헌기록이다. 악보를 재현한다면 획기적이다. 구입하면 어디에 발표할까? 조선일보? KBS?” 이런 기분에서 삼목은 ‘코리아 레포지토리’에 대해 기독교 자료에 밝은 청계천 경안서점 김시한 장로와 나까마 김연창 선생과 단국대 공연자료연구소 김종욱선생 등에게 방訪을 냈다. 나오면 무조건 고가로 사겠다. 그리고 한 턱 내겠다고. 이런 들뜬 기분에 책값이 얼마인지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특별해도 잡지 한 권 값 정도야 못 감당하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번 전화에서 한 권이 아니라 2년치 24개월 합본이며, 가격이 1년 원급이었다. 전화를 받고 3일간을 고민했다. 결국 구입을 포기해야 했다. 너무 큰 가격 때문이었다. 국내 서점이라면 해당 호수만 사자고 조르거나 외상을 하거나, 계약금을 내고 기다려 달라고 사정을 하겠지만, 일본의 서점이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동경 최 원장 비서실에 솔직하게 전달했다. 경제적 부담이 너무 커 구입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삼목은 아쉬움 속에서 ‘코리아 레포지토리’를 놓지 않았다. 그래서 국립도서관은 물론 대학도서관 장서목록과 장서가로 널리 알려진 중대 김근수 교수와 공주대 하동호 교수의 목록 까지 확인하였다. 그러던 여름 장마통에 인사동 고서점 통문관을 들렸다. 몇 번 인터뷰로 뵌 바 있는 이겸로 선생께 최원장과 통화한 이야기를 전하며 그렇게 비싼 것인 줄 몰랐다는 푸념을 했다. 그러자 선생은 자신이 10여년전 취급한 바가 있는데 어디로 납품을 했는지 기억이 없다고 한 뒤 빨간 색 하드커버의 책 한 권을 빼 주었다. 참고할 만 하다며 건네주었다. ‘외국어 표기 간행물 목록’이란 책이다. 퇴근 후 펼쳐 본 이 책에는 ‘KOREA REPOSITORY’의 존재는 물론 총 목차 1896년 2월호에 ‘KOREAN VOCAL MUSIC’이란 아티클이 있음을 확인했다. 최 원장이 2월호 아니면 3월호라고 했으니, 이 글에 아리랑이 언급되었을 것이란 확신이 든 것이다. 그리고 큰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것은 1800년대 외국인이 쓴 한국관련 기사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과 아리랑 같은 노래를 언급한 것은 오히려 우리의 기록 보다는 외국인의 기록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후 삼목은 헐버트는 물론 알렌, 비숖, 같은 선교사들의 자료와 1800년대 말 한국에 왔던 일본 지식인들의 자료까지 검토하기 시작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첫 수확도 거두었다. 단국대 김원모교 수실에서 확인한 시노부 준뻬이信夫淳平(1871~1962)가 동경당서점에서 1901년 발행한 ‘한반도韓半島’를 보게 되었다. 국제법 전공자로 1876년 한국에 와 인천이사청仁川理事廳 이사관으로 근무한 시절을 회고한 책으로, 여기에서 "한성사범학교 교사 헐버트씨의 손으로 직접 이루어진 아리랑 악보~”라고 언급한 사실을 찾아냈다. 일부 원문을 인용하고 번역을 하면 이렇다. 아리랑의 음조音調가 ‘망국적亡國的’이라고 하여 비관적으로 이해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곧 한국관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若し夫れ夜半月を踐んで南山の麓, 倭將臺の 邊を逍遙するあらんか, 無邪氣なる少年か意味なく謠ふ 「アララン」の哀歌は, 東西相聞ゆる擊杵の音と相和し, 歷史の興廢と人事の悲哀とを語るものに似て無量の感慨を生せしむ, 詞藻を解せさる予まで之れを聞ひて一句湧くを止むる能はさるなり. 繫絃已歇仙風生.殘雲搖曳木覔城.天暗夜深人將睡.何處沈沈砧杵聲.韓家婦女何黽勉.獨伴孤燈坐三更.君不聞悠悠掠耳阿蘭曲.悲調自具無限情. 혹시라도 한밤중에 달빛을 밟으며 남산 기슭 왜장대 주변을 산책하는 일이 있다면 그 곳에서 순진무구한 소년들이 따라 부르는 아리랑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와 잘 어우러져, 역사의 흥폐(興廢)와 세상살이의 비애를 이야기하는 듯하여 무망함을 느끼게 된다. 문학적인 시문(사조詞藻)으로 표현하는 것은 잘 못하지만, 이것을 듣고 있노라면 가슴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는 시 한 수 쓰는 것을 자제하기는 어렵다. 거문고 타는 소리 이미 그쳤고 시원한 바람 부네하늘에 떠있는 조각구름 목멱성 남산 위를 오가네날 저물고 밤 깊어져 사람들 잠자리에 들 시각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다듬이질 소리한국의 부녀자들은 그 얼마나 부지런한가?홀로 외로운 등불 앞에 삼경이 되네그대는 들어보지 못했는가 멀리서 들려오는 아리랑을구슬픈 곡조 속에 저절로 무한한 정 담겨있네” 아리랑관觀도 일본적이라는 문제가 있지만 이를 확인한 것은 큰 소득이다. 곁들어 ‘아라란(アララン)’ 또는 ‘아란곡阿蘭曲’이란 표기 확인도 큰 소득이었다. 일본인의 기록 키워드를 확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1984년 여름으로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삼목은 외국인의 아리랑 기록을 찾는 일로 뜨겁게 살았다. 그 사이 결혼도 했고, 한국잡지협회를 나와 ‘한국출판정보센타’라는 기획사를 꾸려 본격적인 사료 수집과 컨텐츠화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 덕에 1901년 시노부 준뻬이의 ‘한반도’ 기록에 이어 1908년 N. 알렌의 'Things Koreans' 소재 아리랑 기록 등을 찾아냈다. 이는 삼목의 아리랑 인식을 전환시키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다음 세 가지를 인식한 것이다. 하나, 아리 또는 아라리와 다르게 아리랑은 민요가 아니고 민중의 노래이다. 둘, 그 기점은 1800년대 중반이다. 셋, 그래서 아리랑은 민요와 다르게 문헌으로 전승하고 확산되었다. 이런 인식을 확신으로 갖게 된 것은 삼목이 문헌 소재 아리랑을 집요하게 매달린 이유이다. 그 첫 결과는 구본희 부국장(2014년 작고)의 권유로 8월 26일자 스포츠조선에 "아리랑 樂譜 最古가 바뀐다”란 제하의 기사를 내게 되었다. "1901년 발간 한반도에 수록 발견 정설로 알려진 총독부자료보다 10년 앞서 ‘아리랑’으로 표기, 4분의 4박자로” *추록-시노부 준뻬이信夫淳平의 ‘한반도韓半島’는 1990년 경인문화사에서 영인본이 나왔다. 삼목이 원본을 구입한 것은 1997년 2월 일본 신보초 한 고서점에서 구입했다. 시노부 준뻬이는 경제학을 전공한 자로 한말韓末 우리나라에서 일본 총영사總領事로 3년 간 근무했다. 서양인들의 저술보다 구체적이다. 발문(跋文)을 쓴 유명인사가 6명이나 된다. 이 책이 국내에서도 읽혔음은 1909년 10월호 ‘대한흥학회보’ 제6호 ‘지역상소역地歷上小譯’(MH生)에서 인용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70)김종욱 [3만인의 벗!-‘벙어리 극단 공연을 보고-] 벙어리가 연극을 하다니- 온! 참 , 장님이 극장 구경 간다는 것과 꼭 같군! 하고ㅠ농아극장 ’남 모르는 사상‘ 상연된다고 하자 이렇게 수군거렸었다. 외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성황에 있던 것이지만 조선에서는 처음의 일이라 하기는 반신반의. 막이ㅡ올려지는 동안을 안타까웁게 기대리었다. 그리고 꼭 ’어색‘하리리 했던 것인데, 막이 열려 극을 보자 그런 기우杞憂는 전혀 부당하였던 것이다. 아니 기우가 부당했다는 것을 의식했다기보다 보통 연극과 같이 관람할 수 있엇다. 한 막이 끝나자 ‘어색’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을 생각하고 그런 점을 잡아 내리려 하였지만 좀처럼 잡혀ㅐ이지를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구태어 찾아내자니 그 손짓이 좀 기이했다던가 변사의 어조가 유난히 귀에 거실리워서 토키 전 시대의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은 감은 나왔으나 그 동작에는 조금도 어색이란 느낌을 갖지 않고 볼 수가 있었다. 극평가가 보는 눈으로는 전문적 여러 점의 견해가 있으리오마는 단순한 관객으로서의 인상은 이러하리라고 생각된다. 벙어리가 하니까 일종의 동정이 의식 전면에 나타나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확실히 벙어리도 연극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잘 알게 되었다.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전연 소인素人들로서 거의가 다 취직하고 있는 사람들로 없는 여가를 틈타서 만 3개월이란 일자를 꾸준히 노력해왔다는 것을 들을 때 노력과 단결이란 어떤 장벽도 넘을 수 있다는 것 같이 여겨졌다. 이 극의 작자요 연출가요 총자휘자인 정동섭鄭東燮(이도 벙어리)씨가 연습 중 때로는 몽둥이로 통솔하였다는 이야기는 그 열성을 충분히 보여주게 한다. 그래도 그 통솔을 달게 받으며 연기자는 몇 일 밤을 새워가면서도 연마를 했다고 한다. 그들의 심정을 살펴봄에 연극으로 하여금 말 못하고 말 못 듣는다는 그만한 제약을 받는 그들의 자신을 위로함은 물론 조선에 있는 3만의 농아자를 위하여 그들을 계몽하고 그들을 지도하려는 순일한 비통의 결심이 단결과 노력이란 것으로 뭉쳐진 소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농아극은 연기로서는 소인극의 역域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조작자가 없는 인형극같은 특수한 연극이나마 이런 점이 아니라 그들이 무언으로 제시한 그들의 단결과 노력과 규율은 일반 연극인의 좋은 거울이 아닐까. 이 시사가 헛되지 않기와 이들이 자신을 자위하고 자기들 봉어리들 광명의 길로 끌려고 하는 그들의 힘찬 움직임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藝術通信 271호. 1946년 8월 24일) ['국전國專‘ 연극 공연, 9월 초순 국도서]: 기보한 바와 같이 국학전문 연극부에서는 동교 창립기념으로 동 연극부 각본계 구성인 '세기의 개가’ 3막 5장을 가지고 제1회 연극발표회를 개최코자 만반의 준비를 거듭해오던 바 드디어 9월 초순부터 열기로 되었다 한다. (藝術通信 271호. 1946년 8월 24일) [연극학도의 수기-연극이전 (2)] 무대예술연구회 제공 혁명가의 정신 진실에 대한 철저한 노력과 자기 희생 진실을 위해서는 일체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無라고 생각하는 정신! 혁명을 도웁는 연극의 정신이 또한 이런 혁명가적 정신과 質이 틀림이 없다. 또한 철학적 정신과도! 소시민적 근성에서 근본적 동요를 거쳐 진부하고 앍고 보수적인 모든 것에서 일체 탈각하여 새롭고 우리들의 독립한 진실에 향한 마음일 것이다. 이것이 즉 연극정신이 아닌가? 근본적 동요란 사색과 자기 반성의 노력한 결과이며 비판적 정신에서 나오며 이 독립을 방색防塞하는 모든 박해에 대하여 지지 않고 용감히 반항하여 싸우는 실천의 용기라고 한다. 이럼으로써 완전히 진보적 입장에 서게 되며 태도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연극이란 무엇이냐?’의 해결은 타인의 설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연극을 하는 정신에 있어 나올 것이다. 따라서 연극을 하는 정신에는 겸손, 정직, 진실 등 말로서는 여러 가지 있겠으나 일언이폐지하면 의식과 자기 충실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하므로 연극은 유행상품도 아니고 사교적 장식도 아닌 것이 명백하나 정신 없이 논설만을 일삼는 향락주의자가 사랑이 없이 색만 구하는 불량청년과도 같이 연극정신이 없이 연극을 구하려는 도락자道樂者와 위선자가 일하지 않고 놀고 먹자는 해충의 존재와도 같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무대상에 화장을 하고나서 빨갛고 푸른 조명에 맞으며 웃는 게 연극이 아니다. 연극을 통하여 정신적 육체적 행동을 근본으로부터 반성하여 낡은 것을 알고 새로운 것을 탐구하여 낡은 것은 낡은 것으로 새로운 것은 새로운 것으로 취사선택하는 영원의 성실을 의미하는 이러한 연극정신이 오래지 않아 혁명적 연극을 낳을 수 있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우선 낡은 것의 탈피작용과 새로운 술을 새로운 부대負袋속에라는 이 새로운 부대의 체득에 있다. 위대한 사상가는 결국 자기에 돌아가서 밑으로부터 근본으로부터 무엇이냐? 왜냐? 누구를 위하여? 의 근본원칙을 추구한 사람들이라 말한다. 이것이 없이는 연극정신도 운운할 수 없다. 즉 사상누각砂上樓閣이다. 이것이 연극이전의 것이며 아울러 연극생활 그것일 것이다. 나는 우리들의 요구에 응하여 어떠한 동기라도 자기의 내부에 돌입하여 감득하여 알고 뉘우쳐서 실제에 움직이지 않으면 싸우는 의지를 정말로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사모하는 진실에 연극정신에 도달하는 수단 그것의 방법으로서 연극을 생활하는 태도를 일상생활에 있어서 똑바로 선도하고 싶다. 과연 될 수 있을까? 또 꾸준히 반성하여가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藝術通信 271호. 1946년 8월 24일)
-
제7화 ‘1/694쪽’의 아리랑(하)묘한 여운을 간직한 채, 접어둔 이 책은 책장 속 깊이 들어갔다. 그리고 2년 여가 지난 어느날, 삼목은 아세안게임행사시 많은 문화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때 삼목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행사의 한 자료를 접하게 되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가곡 발표회’라는 프로그램의 첫 순서 ‘선구자’, 그 옆에 "윤해영 시, 조두남 작곡”으로 되어있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해설 부분에서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1963년 12 30 시민회관, 조두남(1984년 작곡) 작곡 발표회에서 바리톤 김학근 불러 유명해진 곡. 이후 7년간 기독교방송의 ‘정든 우리 가곡’ 시그널뮤직으로 우리에게 친근해진 가곡이다. 작시는 작곡가와 함께 중국에서 활동한 시인 윤해영의 작품이다.” 그리고 선구자 3절이 병기되어 있었다. ‘제2의 애국가’로도 표현되는 가사이다. 1.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2.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3.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분명 애국적인 가사의 노래이다. 그러나 삼목은 곧 출판 할 아리랑 사설집 편집 최종 교정을 보면서도 미심쩍어 한 ‘滿洲 아리랑’과는 상반된 시상詩想이에서 일종의 불안감마저 들었다. 분명 만주 아리랑‘은 ’오족五族‘이란 어휘에서 친일시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짖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목은 서지학자 김종욱 선생이 제공해준 정보 ‘재만조선인통신在滿朝鮮人通信 제16號’로만 출전을 밝히고, 윤해영 작품임은 명기하지 않은 채 수록했다.(‘민족의 숨결, 그리고 발자국 소리 아리랑’ 현대문예사, 1986. 214쪽) 그리고 다시 2년이 지났다. 삼목은 당시 국립극장 허규 극장장, 기획자 이광수, 회원 원재식씨 등과 ‘아리랑축제’를 추진하는 등 동분서주할 때다. 그 와중에 몇 년 만에 다시 윤해영을 되살려 내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서지학자 김종욱 선생으로부터다. "예상했던 대로 만선일보에 안수길, 윤해영 같은 이들의 자료가 많이 나왔어요. 아세아문화사에서 만선일보 영인본을 냈어요. 그런데 김형이 우려했듯이 윤해영은 문제가 있어요. 아리랑만주라는 작품이 나왔는데, 확실해요. 그 가요 ‘아리랑 만주’와는 또 다른 작품이요. 윤해영은 결국 아리랑을 세 편 쓴 것이 되는데. 저녁에 만납시다. ‘滿洲 아리랑’ 복사했으니까.” 1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니 새 하늘 새 땅이 이 아닌가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시구 춤을 추네 2 말발굽 소-리 끊어지면 동-리 삽살개 잠이 드네 3 젖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 오족의 새살림 평화롭네 ‘아리랑 만주’ 보다는 간결한 작품이다. 만주국 기관지 ‘만선일보’ 1941년 1월 1일자에는 신춘문예 민요부에 당선된 작품이다. ‘아리랑 滿洲’ 제1절의 "사천만 오족의 새로운 낙토”와 이 작품의 3절 "오족의 새살림 평화롭네”는 같은 맥락이다. 만주국의 이념인 ‘五族協和’의 표현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삼목은 강원대 박민일 교수에게 윤해영의 작품 사본을 송부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아리랑을 친일 도구로 쓴 것인가!” 삼목은 차마 윤해영의 아리랑 작품들을 언급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리랑의 변절, 이런 막다른 표현이 겁이났기 때문이다. 얼마 후 박민일 교수로부터 ‘친일아리랑’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글을 받았다. 읽지 않고 뒤처 놓았다. 그럼에도 ‘친일 아리랑’이란 표현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여운으로 따라왔다. 1995년 중반은 국학연구 붐이 절정에 이른 시기다. 이는 국내외에서 발간된 각종 간행물들이 국가기관이나 연구단체 등에서 수집하여 각 도서관에 비치됨으로서 가능했다. 만주지역에서 간행 된 출판물과 정기간행물도 이 시기 전후 영인 되어 연구 자료화가 가능했다. 만선일보(1936~1948)나 흥아협회 기관지 ‘재만조선인통신’,‘중국조선족문학사’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결과로 만주지역 조선인 문학에 대한 학계의 조명이 이뤄졌다. 이에 따라 윤해영이란 시인에 대한 작품도 조명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1995년 중반 이 시를 비롯한 윤해영의 시가 총 9편이 있음이 드러났다. 인천대 오양호 교수가 논문 ‘윤해영 시의 율격과 시대의식 고찰’에서 밝힌 것이다. 9편은 다음과 같다. 용정의 노래, 만주 아리랑, 오랑캐고개, 해란강, 아리랑 만주, 발해고지, 사계, 척토기, 낙토만주 이 논문의 결론은 "9편의 시에 나오는 선구자는 조두남 작곡의 가곡 ‘선구자’와는 정반대다. 결국 윤해영이 선구자 작시 이후 변절한 증표이다.”라는 것이었다. 이런 대비는 이미 가곡 ‘선구자’가 받고 있는 평가 때문이다. 예컨대 1990년 연변인민출판사가 간행한 ‘중국조선족문학사’의 이런 평가이다. "선구자는 1930년대 초기에 창작된 후(조두남 작곡) 널리 보급되어 크낙한 영향력을 산생한 노래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현대의 령마루에 서서 흘러간 민족의 력사를 돌이켜 보면서 외래의 강포에 대항하고, 민족해방을 위하여 분연히 떨쳐나 슬기와 용맹, 절개와 위훈으로 자랑을 떨친 우리 조상들 특히 선구자들을 절절하게 추모하면서 민족의 비운을 찬몸에 지니고 나라와 미녹을 건져 낼 선구자들의 출현을 그 같이 고대하고 있다.이 노래는 그 시적 정서가 비장하고 겨레의 넋이 세차게 사품치고, 민족의 념원과 정서를 대변함으로 하여 당시는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아주 널리 전승 되여 불리우고 있다.” 이것이 1990년대 중반의 윤해영의 시에 대한 평가였다. 이로부터 윤해영은 ‘선구자’ 외의 작품은 친일 시로서 혐의嫌疑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의외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1984년 조두남선생이 작고할 때 까지도 문제가 없던 것으로, 1982년 세광출판사 발행 조두남 수필집 ‘그리움’에서 기술한 짧은 진술 때문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1932년 목단강의 허름한 여관에 묶고 있었을 때 한 젊은이가 내게 ‘용정의 노래’를 주며 작곡해 달라고 사라졌다. 아마도 이 젊은이는 독립군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 젊은이를 만나지 못하고 해방이 되어 돌아와 선구자로 곡명을 바꾸어 발표했다.” 조두남은 이 책을 낸 2년 후 작고했다. 그런데 해방 전 까지 조두남과 함께 음악활동을 한 재 중국 음악인들이 한국과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이 진술이 거짓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조두남이 ‘징병령 만세’ 같은 친일 작품을 작곡한 과거를 숨기기 위해 그랬으며, 윤해영도 해방이 될 때까지 함께 음악활동을 했음은 물론, 친일 시를 썼다는 사실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급기야 한국에 유학을 온 연변 음악가 류연산씨가 2004년 ‘일송정 푸른솔에 선구자는 없었다’라는 책에서 다양한 증언과 자료를 통해 조두남과 윤해영의 친일 음악활동상을 밝혀 조국에 알린 것이다. 이런 결과로 조두남과 윤해영은 친일 음악가로 규정되었다. ‘선구자’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니 세 편의 아리랑 시를 슨 윤해영은 아리랑을 친일의 도구로, 민족 정서를 팔아먹은 반역의 시인이 되었다. 아리랑의 역사에서나 한국문학사에서나 세 편의 아리랑 시를 쓴 이는 윤해영이 유일함에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2004년까지 조두남이 윤해영의 시 ‘용정의 노래’를 ‘선각자’로 바꾸고 시도 일부 개작하였다는 사실도 밝혀지게 되었다. 결국 윤해영의 ‘용정의 노래’는 애초부터 친일 시였다는 것이다. 삼목으로서는 자료적인 관심 외에는 어떤 해석도 더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책장 속에 넣은 ‘半島史話와 樂土滿洲’를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았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2005년 11월 3일자 삼목의 일기장에는 여러 메모 한 모퉁이에 이렇게 쓰여 있다. "어제 산 김연수의 ‘몽상의 시인 윤해영’을 대충 읽었다. 논의의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에서 "친일시인이 아니라 진솔한 민족시인"이란 규정 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적 해석 영역에서 이런 구절은 논의의 여지가 있을 듯하다.” 그리고 그 밑에 이렇게 다섯 문장을 인용하여 놓았다. 저자 김연수의 주장이다. *"낙토만주는 고구려와 발해의 환유로 민족의 꿈이고 기도이며 또 기도가 소원하는 파노라 마의 내용이다.” *"만주국을 찬양하는 시가 아니라 만주가 사실은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었으니 의당 지금도 우리의 땅이라는 저의가 담긴 시이다.” *"오색기(五色旗)도 만주국의 국기인 오색기가 아니라 고구려의 오색기다.”*"낙토, 오색기, 오족 등 그의 어용적 자세를 추정하게 하는 낱말들을 쓴 것은 실은 저의를 감추고 검열 등에 선수를 치기 위한 (검열관이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시를 외향적 의미로 단정 짓는 무지한 현상이 안타깝다. 윤해영이야 말로 일제 강점기 재 만 시인 가운데서 가장 특출한 방식으로 저항정신을 구현하면서 저항의 길을 걸어간 한 사람의 저항시인이다. 그것은 민족의 꿈을 이렇게 아리랑 정서에 담아 검열과 감시의 장애물을 넘어 민족을 향해 읊은 진솔한 시인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2011년, 삼목은 ‘한국의 아리랑문화’(국제문화재단 편)를 공동 집필했다. 그 중에 ‘훼절의 아리랑, 악극 아리랑’ 항목에서 1940년대 일제 국민총동원 체제 악극 상황을 파악했다. 일본어로 진행되는 ‘나니오부시 아리랑’ 같은 작품이 그 하나인데, 유독 아리랑을 표제로 내세운 작품들이 악극화 하였던 것이다. 당연히 연예단을 동원하여 군수공장 같은 곳의 위문공연용이었다. 이 현상에 대해 삼목은 이런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소수민족이나 식민지 상황에서 외세에 대한 최후적인 대항에서는 가장 민족적인 정서로 대응한다. 저항력과 결속력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동아전쟁의 말기적 상황에서 아리랑을 내세워 저항한 것은 이런 이유가 아닐까?” 삼목은 오랜만에 윤해영의 아리랑 시를 떠 올렸다. 그리고 나름의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윤해영도 당시 만주국의 군사적 팽창의 위협 하에서 아리랑이라는 민족적인 정서를 내 세워 최후적인 저항을 한 것은 아닐까라는 해석이다. 삼목의 청춘시절 ‘1/694쪽’의 아리랑, 30여 년을 앓고 있다. 아리랑의 해석은 간단하지가 않다.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9)김종욱 극장 대여 입찰 심사단에서는 작금 별항 야기되고 있는 국립극장 문제에 대하여 작일 심사단 일동은 ‘앤더슨’ 지사를 방문하고 양자 간에 벌어지고 있는 분규에 대하여 질의를 한 바 있었다 한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시내 극장 동원표] 극장 제명 입장인원 국제 영화 ‘자유를 우리에게’(7일) 2067 극단 황금좌 공연(1일) 2060 국도 극단 낙랑극회(6일) 677 (7일) 840 수도 영화 ‘아부라함 링컨’ (6일) 3404 (7일) 840 중앙 극단 청춘극장 (7일) 366 악극단 새별(1일) 1712 서울 영화 ‘진주의 목걸이’ (2일) 979 (3일) 7352 단성 영화 ‘밀림의 砲兒’ (1일) 1459 (2일) 2592 장안 극단 농아극장 (2일) 680 (3일) 891 제일 백민, 백조, 태평양 공연 (6일) 600 (7일) 726(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인사] # 정흥섭鄭興燮(농아극장聾啞劇場 총무) 농아극 ‘남 모르는 사상’ 공연 인사차 래사 # 현학수玄鶴洙(동 극장 사업부) 동상 (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음악= [문교부에서 현상 작곡 모집]: 문교부장 유억겸兪億兼씨가 작일 발표에 의하면 문교부에서는 전조선인의 작곡을 장려하기 위하여 남조선주민의 현상작곡 모집을 주최하고 있다고 한다. 중등학교 합창 중 우수작품 3점의 작곡가에게는 상을 수여하고 또 이 작품을 중등학교 음악교과서에 편입할 것이다. 제재題材는 조선인의 생활을 상징하는 것이어야 되는데 그 작품은 전연 창작이고 소박한 제재이고 또 중등학교 합창용에 적당한 점 등을 참작하여 심사할 것이다. 곡의 길이는 10분 이내이어야 되며 조선민요, 고담, 고곡요古曲謠 기타 고전요古典謠 기타 조선 역사적 사실 등에서 취재하기 바란다고 한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강화유학생회 ‘연예의 밤’ 성황]: 강화유학생회江華留學生會에서는 귀향을 기회로 지난 16, 7 양일 읍내 잠두예배당蠶頭禮拜堂에서 ‘연예의 밤’을 개최하고 지방민에게 적지 않은 감명을 주었다는데 당일 프로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남성 독창: 권평환權平煥(세대世大), 송윤석宋允錫(경농京農), 김정원金鼎遠(배재培材), 고명선高明善(인중仁中), 금식琴植(경대經大) 2. 여성 독창: 김인배金仁培(이고녀二高女), 박덕순朴德順, 이윤화李允華(여의전女醫專) 3. 남성 4중창: 권평환, 강우철康宇哲, 오대식吳大植, 양현문梁顯文 4.'민족의 투쟁‘ 전 3막 (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예술= [예술대학 발기인대회 래 28일 중앙애육원中央愛育園서 개최]: 영화동맹과 연극동맹 그리고 미술 기타 각 단체 공동으로 예술대학 건립을 목표로 동 기성준비위원회를 결성한 다음 이래 준비 중이라 함은 누보한 바 있거니와 드디어 이에 관한 모든 구체안이 성립되었으므로 오는 28일 오후 1시부터 시내 명치정 중앙애육원에서 문화 각계 인사를 총망라한 종합예술대학 발기인대회를 개최키로 되었다 한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8)김종욱 벙어리들의 연극= 남모르는 사상 조선에서 처음으로 22일부터 3일 동안 장안극장에서 상연되어 서울의 인기를 한데 뫃았는데 이를 널리 소개코자 조영의 ‘해방뉴스’는 22일 오후 4시 반부터 공연장인 장안극장 무대에서 이 연극 4막 5장 중 일부 장면을 수록하였다고 한다. .(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그 여자의 ‘사랑 니[치齒]’- 낙수첩]: 연극여우 모 여사를 모두 아직 어린아이라고 부른다. 여보 농담일망정 그런 말은 좀 사양하시오. 남편 있는 어린 아이가 어디 있단 말이오(모 여사는 예술인 모 씨와 동서하고 있음. 순직한 모 씨 정색으로 편을 드니 장본인인 모 여사 "엄마!”하고 입을 커다랗게 열었다. 보니까 아닌 게 아니라 어른이면 누구나 물론 나 있어야 할 ‘사랑 니[치齒]’가 아직도 날려면 까마득- "쨋! 이[치]도 제대로 나기 전에 시집을 가다니! ”하고 편 들은 순직한 친구 다시 한번 실망적 분개- 따는 "엄마”하고 고함치는 것으로나 시비의 ‘사랑 니[치]’ 안 날 것쯤으로는 이 시절 여성의 생리조건은 달라진 것 본인은 편들어주는 이를 오히려 원망하더라고?.(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미술= [해방 미전 출품목록] #조형= ‘수목樹木’ (이봉상李鳳商), 자기‘磁器와 소녀’ (유영무柳榮茂), ‘빨간 찬장과 아기’ (서강헌徐康軒), ‘시위示威’ (이병효李炳孝), ‘황폐’ (이규로李圭魯), ‘꽃’ (박상동朴商東), ‘풍경’ (엄도만嚴道晩), ‘말’ (조병덕趙炳悳), ‘자유상自由像’ (유석연柳錫淵), ‘ 들’ (김선재金載善), ‘일하는 청년’ (염봉진廉奉鎭), ‘정물靜物’ (윤자선尹子善), ‘한구풍경漢口風景’ (임군홍林群鴻), ‘풍경’ (이규호李圭皓), ‘풍경’ (박성규朴性圭) #건축= 조선주택개량안‘ (오영섭吳英燮), 선렬위령탑’ (손중모孫中模), ‘해방기념탑’ (안일수安日洙) #포스터= ‘신문화건설’ (한홍택), ‘포스터’ (이완석李完錫) (끝) .(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사진= [오대산 기록사진, ‘사예寫藝’서 일반공개]: 조선사진예술협회에서는 과반 조선산악회 주최의 오대산학술조사대에 참가하여 시종 기록촬영에 위대한 성과를 걷우고 귀환하였다는 바 금번 그 전 작품을 모아가지고 오는 10월 2일부터 1주일 간 서울 시내 동화백화점 갤러리에서 열리는 산악회 주최의 보고전에 일부로 사진부전으로서 일반 공개키로 되었다 한다. .(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극장= [국립극장 문제는 어디로? - 돌연한 합동통신과의 공동 경영설 대두로 이것을 거부하는 국극위원측의 귀추와 당국의 해결책 나하奈何? ] : 조선에 국립극장의 설립과 극장은 문화인에게라는 소리가 비등하여 그간 당국에서는 시내 16 적산 극장을 문화인 혹은 적당한 후보자 대여 입찰제를 채용 g하여 이를 실시키로 하여 일반이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간 문화인들로 조직된 심사단이 이미 입찰의 심사를 종료한지 수개월이 지나도록 당국에서는 이 심사결과에 대하여 하등의 구체적인 해결발표가 없어 매우 사계에서 주목을 끌고 있던 차 드디어 거 19일에야 비로소 국제극장만에 대한 해결을 지키기 위하여 경기도 재산관리처에서는 군정청 교화국 관계자와 국립극장 위원과 또한 의외로 등장된 동업 합동통신 경영자들을 초청하여 현 국제극장을 국립극장 위원측과 합동통신사측과 공동경영을 하여 달라는 제시가 있었다. 그런데 국립극장에 한 목 끼게 된 합동통신사에 대하여 국립극장측 관계자들은 즉시 이를 반대하는 한 편 이 합동통신사의 출현에 관한 경위를 규명하여본 결과 합동통신사는 최근 동사의 운영 관계 상 국제극장을 동사 배양기관培養機關으로 삼기 위하여 4분지 3의 운영권을 ‘앤더슨’ 경기도지사로부터 양해를 받았다고 주장하는데서 나오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현재 도 당국에서는 국립극장 측과 합동통시 측과 합의하여 공동경영을 하여달라는 데 대하여 합동 측은 시초의 주장대로 ‘앤더슨’ 지사로부터 우리는 전기의 권리를 받았다고 고집하며 한 편 국립극장의 주장은 프로 편성 중 50% 상영은 ‘앤더슨’씨가 요구하여 왔기에 우리는 그것만을 합동통신과의 공동운영 이야기는 모른다는 주장인데 이리 되고 보면 국제극장만을 가지고서는 이 문제의 해결은 어려울 듯이 보인다. 이리하여 작 22일까지의 추세를 보면 국립, 합동 양측에서는 도 당국에 딴 의미의 의견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기로 되었다는데 이에 대한 당국의 제2목표는 과연 무엇일까? 그런데 작 22일 극장대여 입찰심사원 이서향씨와 국립극장 설립위원회 채정근 사무국장을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극장대여 입찰심사원 담: 극장 관계의 전 예술분야를 망라해서 성립된 극장대책위원회의 대표로 우리들 3인이 극장 입찰자 심사에 참가한 바이 있으나 우리들의 심사결과대로 낙찰이 되느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일반의 희망만으로서는 해결 안 되는 군정 당국의 처리여하에 있는 것인 줄 안다. 최근 국제극장을 놓고 국립극장 위원과 합동통신 양자 간에 마찰이 발생하고 있는 듯한데 여기에 대해서는 상식으로 생각해도 국제극장이 국립극장 위원회에 낙찰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점에는 다른 심사원들도 동일한 의견이다. 이러한 심사원 각자의 의견이 저번 종료한 입찰자 심사에 반영되었느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상상에 맡긴다. =국립극장 설립위원회 사무장 담 : 예술가들이 같은 이념에서 자기와 관계없는 통신사를 접수한다면 도 당국에서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우리들도 이와 같은 견지에서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7)김종욱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보다 제일 즐거운 일은 없다. 사실 상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 확실한 대답도 못 얻고 이렇게 ‘헛개비’에 씌운 것 같이 남이 볼 적에는 그야말로 들떴다고까지 보겠지만 하여튼 즐거운 것은 틀림없다. 연극의 매력이란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연극을 보는 즐거움- 연극을 만드는 기쁨- ‘무대예연舞臺藝硏’에 입회한 나는 정말 생활을(생존이다)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요사이 이런 신흥연극의 집단을 통하여 작으나마 연극 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 연극에 대한 사랑이 통일하고 절대적이라고 자부하던 마음이 점점 의심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유희본능에서만 고치려는 타성惰性이 싫어진 것이다. 이것은 축지소극장 내 화장실에서 본 바의 이야기인데 자기의 모든 생활을 극장에 바치고 사상의 전부 감정의 전부를 연극에다 쓰고 과거의 신극의 길에 봉사하던 사람이 그때 우리들(연극학도)과 같이 조연하고 있는 것을 보고 특히 자기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또 자기의 자식까지도 데리고 와서 화장을 하고 있지를 않았나. 父子 동반의 조연 연극을 하였기 때문에 생활에 짓눌리고 생활의 고통을 받아도 또 연극을 한다는 이런 연극을 아니 하고는 못 배기는 마음 얼마나 존귀하고 거룩한 심정일까? 이러한 자각이 각오가 나에게 있는가 묻는다면 아무 말도 못할 것 같다. 그저 나는 그런 힘이 끊임없도록 원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연극의 길은 가시덤불의 길이라 성공이 없는 길이라 가진 곤란과 또 대폭풍을 예상할 때 연극의 연구를 그만두는 것이 어떠냐고 유혹을 받았다고 해서라는 곧 단념을 하고 방향전환을 할 것인가. 아니다. 연극의 길이 아닌 곳에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오. 연극보다 더 매력 있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연극도 혁명에의 일이다. 고연 이런 예술에 봉사하며 이런 예술을 위하여 희생이 되겠는가? 그저 덮어놓고 연극은 예술이다라는 관념만으로 지금껏 자기의 입장 태도 및 회의적인 사고가 적었음은 솔직히 고백한다. 이것이 과거 선배 제형의 말씀이 진의미를 못 일아 들은 원인의 하나인 것이다. 새로운 사회를 위하여 새로운 연극의 창조를 염원하는 연극학도들의 동지가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새로이 돌진하여가려는 이때에 이러한 연극 이전의 것이지만 이것이 곧 연극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반성한다는 것이 적었음을 후회한다. 더욱 앞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으나 정작 목표를 어디 다 둬야 하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연극이란? 라고 나는 곧 누구한테든지 묻고 싶다. 그러나 먼저 나 자신이 그 답을 이해할만큼 자라났나가 의문이다. 나는 깊은 연극학자는 알아도 무대의 실천가가 되고 싶다. 인민 대중앞에 아니 속에 들어가는 무대의 투사가 되고 싶다. 그것을 위한 연구이다. 혹인은 너는 연극이전의 것을 많이 깊이 생각함이 좋다라고 말하였다. 연극 이전의 것이란 또 무엇인가? 나에게는 크나 큰 문제였다. 그것이 이즈음의 ‘무대예술’의 연극생활에서 감득하고 이해(자기 정도로)할 수 있게 되었다. 우라들의 ‘모토’- 진실 탐구가 말하고 있지 않나. 진실의 탐구- 이것은 비판을 의미하며 진실을 사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연극이전의 것이 아닌가? 연극정신의 원천이 아닌가? 나는 곧 또 ‘연극정신이란 무엇인가?’ 라고 수박 겉핥기로 정의를 내리고 싶다. 이런 것이 정의를 내림으로써 체득할 문제인가? 요사이에 나는 이것은 여하히 넓게 책을 읽었다 치더라도 양으로서 도저히 알 수 없는 질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6)김종욱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보다 제일 즐거운 일은 없다. 사실 상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 확실한 대답도 못 얻고 이렇게 ‘헛개비’에 씌운 것 같이 남이 볼 적에는 그야말로 들떴다고까지 보겠지만 하여튼 즐거운 것은 틀림없다. 연극의 매력이란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연극을 보는 즐거움- 연극을 만드는 기쁨- ‘무대예연舞臺藝硏’에 입회한 나는 정말 생활을(생존이다)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요사이 이런 신흥연극의 집단을 통하여 작으나마 연극 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 연극에 대한 사랑이 통일하고 절대적이라고 자부하던 마음이 점점 의심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유희본능에서만 고치려는 타성惰性이 싫어진 것이다. 이것은 축지소극장 내 화장실에서 본 바의 이야기인데 자기의 모든 생활을 극장에 바치고 사상의 전부 감정의 전부를 연극에다 쓰고 과거의 신극의 길에 봉사하던 사람이 그때 우리들(연극학도)과 같이 조연하고 있는 것을 보고 특히 자기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또 자기의 자식까지도 데리고 와서 화장을 하고 있지를 않았나. 父子 동반의 조연 연극을 하였기 때문에 생활에 짓눌리고 생활의 고통을 받아도 또 연극을 한다는 이런 연극을 아니 하고는 못 배기는 마음 얼마나 존귀하고 거룩한 심정일까? 이러한 자각이 각오가 나에게 있는가 묻는다면 아무 말도 못할 것 같다. 그저 나는 그런 힘이 끊임없도록 원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연극의 길은 가시덤불의 길이라 성공이 없는 길이라 가진 곤란과 또 대폭풍을 예상할 때 연극의 연구를 그만두는 것이 어떠냐고 유혹을 받았다고 해서라는 곧 단념을 하고 방향전환을 할 것인가. 아니다. 연극의 길이 아닌 곳에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오. 연극보다 더 매력 있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연극도 혁명에의 일이다. 고연 이런 예술에 봉사하며 이런 예술을 위하여 희생이 되겠는가? 그저 덮어놓고 연극은 예술이다라는 관념만으로 지금껏 자기의 입장 태도 및 회의적인 사고가 적었음은 솔직히 고백한다. 이것이 과거 선배 제형의 말씀이 진의미를 못 일아 들은 원인의 하나인 것이다. 새로운 사회를 위하여 새로운 연극의 창조를 염원하는 연극학도들의 동지가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새로이 돌진하여가려는 이때에 이러한 연극 이전의 것이지만 이것이 곧 연극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반성한다는 것이 적었음을 후회한다. 더욱 앞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으나 정작 목표를 어디 다 둬야 하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연극이란? 라고 나는 곧 누구한테든지 묻고 싶다. 그러나 먼저 나 자신이 그 답을 이해할만큼 자라났나가 의문이다. 나는 깊은 연극학자는 알아도 무대의 실천가가 되고 싶다. 인민 대중앞에 아니 속에 들어가는 무대의 투사가 되고 싶다. 그것을 위한 연구이다. 혹인은 너는 연극이전의 것을 많이 깊이 생각함이 좋다라고 말하였다. 연극 이전의 것이란 또 무엇인가? 나에게는 크나 큰 문제였다. 그것이 이즈음의 ‘무대예술’의 연극생활에서 감득하고 이해(자기 정도로)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들의 ‘모토’- 진실 탐구가 말하고 있지 않나. 진실의 탐구- 이것은 비판을 의미하며 진실을 사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연극이전의 것이 아닌가? 연극정신의 원천이 아닌가? 나는 곧 또 ‘연극정신이란 무엇인가?’ 라고 수박 겉핥기로 정의를 내리고 싶다. 이런 것이 정의를 내림으로써 체득할 문제인가? 요사이에 나는 이것은 여하히 넓게 책을 읽었다 치더라도 양으로서 도저히 알 수 없는 질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5)김종욱 ‘선착 100명 한 초대장 진정’: 본사 정례 제5회 특별초대시사회를 오는 26일(월요) 오전 9시 반 정각부터 시내 국제극장에서 개최한다. 작품은 기旣히 본 지상에 소개한 바 있는 금차 대전의 장편영화 진주만의 폭격으로부터 ‘카이로’ 회담까지의 기록을 집성한 미 육해군성 정보부 제작 전 우리 말 판 ‘世界第2차대전’ 6권이다. 초대는 예에 의하여 신문관계자에 한하나 본지 독자로서 선착 백 명 한 초대한다. 신입은 황금정 2정목 199(일본생명 옆 3층 빌딩) 본사에 내참하면 된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조선영화의 고뇌: 서광제 문학은 신문 잡지 기타 출판물을 통해서만이 문학 활동을 할 수 있고 또 연극은 희곡에 그치지 말고 무대 상연이 있음으로써 연극활동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말인데 그러려면 영화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영화 그 물건이 스크린에 상영됨으로 영화활동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해방 후 1년 간 조선영화동맹이 민주주의 노선을 쫓아 다대한 활동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일반적 의미에 있어서 새로운 조선건국에 있어서의 광범위의 문화운동의 일부분이었을 것이며 결코 만족할 만한 영화운동의 전부는 아니었을 곳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만족할만한 영화운동은 무엇일까?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영화제작 활동일 것인데 이것은 잔인한 일제의 조선문화 탄압으로 인하여 아무런 영화 생산적인 기계 문화유산을 남겨놓지 못한 까닭에 조선영화의 고뇌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해방 후 극계를 보면 해방 초기에 그들은 하고 싶은 연극을 어느 정도 마음껏 해보았다. 그리고 현재에 있어서는 상연물 자체의 저조와 극단 자체의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다.‘ 극단 자체가 위기에 서고 연극인의 최저생활 보장까지도 협위脅危를 맞게 된 것은 여러 가지의 주관적 객관적 이유가 있겠으나 나는 솔직히 이 자리에서 같은 예술가로써 지적하고 싶은 것은 연극인 자신의 ‘신세리티’의 결여와 근시안적 연극행동에 다분히 있지 않았는가를 말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우리 영화인은 연극인들의 연극 활동을 부러워했고 영화가 가진 ‘매카니즘’을 다시 탄식했던 것이다. 해방 후 1년, 우리 영화인 총의總意(물론 진보적 영화인)에 의한 작품 하나를 갖지 못한 것은 조선 문화의 빈곤 을 여실히 말하는 것은 물론이겠지만 이럴수록 우리들은 이러한 문화적 빈곤을 가져올 우려가 있는 모든 봉건적 잔재와 일제적 잔재와 새로이 약동하는 ‘파쇼’를 적극적으로 또는 용감히 파쇄시키는 데 전력을 다 해야 하며 우리는 좁은 의미의 영화 문화 발전을 위해서 안으로 우리의 역사적인 노선인 민주주의 민족문화 건설을 방해하는 일체의 반동세력과 과감히 투쟁해야 한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초추의 은막 미 영화 3편]: ‘카사브랑카’,워너 영화) , ‘최후의 지옥선’(파라마운트 영화), ‘ ’저주의 집‘ (파라마운트 영화) ** 내용 생략 ** .(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전국 영화인대회 경과]: 이남 영화인 제1회 정기대회는 애정과 같이 일작 20일 오후 2시부터 시내 황금정 2정목 영화동맹회의실에서 영화인 50여 명 참석 하에 상영되었다. 회의는 검열제의 외국영화 독점 수입을 반대할 것. 미소영화인에게 보내는 메시지 결의 통과 등이 있었으며 동맹의 조직을 일층 강화할 것을 전제로 종래의 위원장제를 폐지하고 새로이 중앙위원으로 최고 결의 집행의 결의제를 채택하는 등 진지한 토의가 있은 다음 동 6시에 산회하였는데 이날 개선된 위원은 다음과 같다. 서기장 추민秋民, 중앙집행위원 이병일, 서광제, 김정혁, 이재명, 박기채, 강신웅, 이창용, 이기성李基星, 민정식閔政植, 문예봉, 윤상열尹相烈, 김한, 성동호, 이기환, 독은기, 허달, 추민 .(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4)김종욱 검열 월일 제명 소유자 8. 10 ‘잠꼬대 뽀빠이’ 중앙영배 同 ‘조선자造船者 미키마우스’ 동 洞 ‘전후戰後’ 공보부 (藝術通信 269호. 1946년 8월 21일) =미술= [미술단체 합동 진보-진척-!] : 조선조형미술동맹과 조선미술가동맹과 이 두 단체기 합동에 관한 준비를 착착 진척 중에 있다 함은 누보한 바 있거니와 양 단체에서는 드디어 합동문제에 관한 기술적 기타 여러 가지 구체안이 성립되었으므로 今 21일 오후 2시부터 시내 정동정貞洞町 이화고녀 강당에서 양 단체 합동 제1차 준비위원회를 개최한다는 바 이 회의의 동향이 크게 주목된다.(藝術通信 269호. 1946년 8월 21일) [미전 초일 관객 1만명 돌파] : 종합문화 대전람회의 뒤를 이어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조형미술동맹 급 조각가협회의 합동미술전은 예정대로 작 20일부터 26일 까지 1주일 간 시내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최되어 초일의 래람자來覽者 1만 여명을 돌파하여 전례없는 대성황을 이루고 있는데 출품작명과 작자는 다음과 같다. # 미동 = ‘남산’ (김령교), ‘비등’(이순종李純鍾), ‘피고 피고’ (이인성), ‘ 여운형선생’ (윤형렬尹亨烈), ‘자유에 주렸던 무리’ (오지삼吳智三), ‘서울운동장으로’ (이춘남李春男), ‘소묘’ (채남인蔡南仁), ‘ 작품 제5호’ (최은철崔恩哲), ‘아침’(손영기孫英奇), ‘여름의 오후’ (유성연柳成淵), ‘출로’ (박찬식), ‘ ’출발‘ ’벽보활동‘ (박진명朴振明), ’실업失業' (김각열金珏烈), ’ 요물妖物‘ (김관현金寬鉉), ’비판‘ (박래용朴來龍), ’만추晩秋‘ (조남표趙南杓), ’인물‘ (이동일李東日), ’안顔‘ (이인구李麟九), ’정물靜物‘ (김금배金錦培), ’춘일春日‘ (이성준李成俊), ’고등어‘ (조관형趙寬衡), ’ 무희舞姬‘ (이세득李世得), ’인물습작‘ (윤흥섭尹興燮), ’한정閑庭‘ (박상옥朴商玉), ’소년‘ (박노양朴魯陽), ’산‘ (조국환趙國煥), ’후부상後婦像‘ (김승옥金承玉), ’풍경‘(박동朴同), ’ 부인상婦人像‘ (김순배金舜培), ’호응呼應‘ (기웅奇雄), ’습작‘ (박수천朴壽天), ’전위前衛‘ (박문원朴文遠), ’훈장‘(이주홍), ’인물‘ (김진항金鎭恒), ’고 윤전사尹戰士-봉길奉吉 초상- ‘ (김일봉金一峰), ‘나체’ (박승근朴昇根), ‘농촌의 아침’ (구본영具本英), ‘운雲’ (김영희金永熙), ‘직흥直興’(변영원邊潁源) =조형= ‘건어乾魚’ (이석주李奭柱), ‘초상’ (방덕천邦德天), ‘자광慈光’ (김백학金伯鶴), ‘산’ (신홍휴申鴻休), ‘고 윤전사 봉길 초상’(김일봉金一峰), ‘회화’ (이계상李揆祥), ‘거리 풍경’ (박득순朴得淳), ‘생生’ (김만형金晩炯), ‘풍경風景’ (최재덕崔載德), ‘마포강麻浦江 선창船艙’ (김각한金珏漢), ‘일년감一年柑’ (유경채), ‘백일홍’ (정온녀), ‘봄’ (안기풍安基豊), ‘백두白頭’ (김혈수金血洙), ‘ 8. 15의 기록’ (박영선), ‘산’ (김찬희), ‘붉은 모자’ (이건표李建杓), ‘소녀’ (이해성李海晟), ‘해방기념’ (한홍택韓弘澤), ‘풍경風景’ (현충섭玄忠燮), ‘풍경’ (길진섭), ‘환희’ (천지민千支民), ‘불상’ (이수억李壽億), ‘인물’ (손일현孫日鉉), ‘석양’ (정종녀), ‘탈’ (이석종李碩鍾), ‘화花’ (김진황金振璜), ‘환무歡舞’ (김기창), ‘군상’ (정완섭鄭完燮), ‘평화’ (박래현), ‘사색’(주예순朱藝珣), ‘수국水菊’ (문원文園), ‘소녀’ (조병현趙炳賢) (藝術通信 269호. 1946년 8월 21일) [자칭 화가가 지폐 50만원을 위조]: 시내 동사헌정東四軒町 48에 거주하는 화가 김걸金傑(31)은 지난 16일 5인조 50만원 지폐 위조사건으로 경기도 경찰부로부터 검거되어 목하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는데 작日 장 제일관구 경찰청장의 발표에 의하면 김은 그간 공범자인 4명과 결탁하여 50만원의 위조지폐를 발행하여 그중 10만원을 김의 가족을 시키어 정화正貨로 교환하고 224, 850원을 검거 당시의 경관에게 압수당하고 그 밖에 20만원을 파훼破毁한 것이 판명되었다고 한다.(藝術通信 269호. 1946년 8월 21일) =극장= [서울 시내 극장 동원표(17. 18일)] 극장 제명 입장인원 국제 영화 ‘자유를 우리에게(제6일) 1900 국도 낙랑극회, 서울관현악단 (제5일) 633 수도 영화 ‘아부라함 링컨’ (제1일) 3676 중앙 극단 청춘극장 공연 (제6일) 371 서울 영화 ‘진주의 목거리’ (제1일) 891 장안 농아극장 공연 (제1일) 589 제일 백조, 백민, 태평양 합동 공연 (제1일) 578 단성 극단 민예 공연 (제6일) 328(藝術通信 269호. 1946년 8월 21일)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3)김종욱 문학의 대중화를 급속히 촉진시키고자 8월 10일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 서울 시 지부는 위원장에 김기림씨, 부 위원장에 조벽암, 박노갑, 허준 3씨와 집행위원장으로 박태원 씨 이하 46명을 선거했던 바 금반 다시 서기국 부서와 각부 위원을 다음과 같이 결정, 제반사무에 착수했다고 하는데 서울 시 지부의 결성으로 말마아마 동맹 본부의 사무는 중앙집행위원회와 자방 사무만이 남고 기타는 전부 서울 시 지부에서 처리하기로 되었다 한다. # 서기국 부서= 서기장 金永錫, 총무부장 이진영李振榮, 사업부장 김상원金相瑗, 조직부장 배호裵澔, 출판부장 지봉문池奉文, 선전부장 이용악 # 각부위원= 시부 위원장 김광균, 위원 임원호任元鎬, 정지용, 조허림, 노천명, 김상원, 권환, 설정식, 윤태웅, 여상현, 이흡, 오장환, 이용악, 김철수, 박아지, 소설부 위원장 현덕, 위원 계용묵, 김남천, 김학철, 지봉문, 김만선, 박영준, 박찬모, 박계주, 홍구, 윤세중, 채만식, 박태원, 이선희, 지하련, 곽하신 평론부 위원장 임화, 위원 이원조, 이명선, 김동석, 배호, 송완순, 안영일, 박치우, 김태준, 나선영羅善榮 희곡부 위원장 함세덕 위원 이서향, 김태진, 박영호, 조영출, 김이식金二植, 김건金鍵(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문화= [종합문화전람회 대호평리에 폐장]: 지난 12일부터 동화백화점에서 벌려진 종합문화전람회는 관람자 6만여라는 기록을 세우고 작 19일로 호평리에 끝났다.(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인사] 박진명朴振明씨(미술동맹 서기장) 8. 15기념 미전 개최 인사차 래사 김두수씨 (한성극장협會 발기준비 인사차 래사 (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연극= [소인극운동에 대한 의견서 (4)]: 조선연극동맹 서기국 발표 5. 경비 상업극단은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연극 같으면 소인극은 경제적 이익을 목적치 않는데 그 특질이 있고 어데 까지든지 공공적인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로 입장료도 없는 것이 좋으며 직장원의 성의와 관심으로 공연을 가질 것이로되 그것도 무리해서 공연을 가질 필요는 없다. 다만 전 직장원의 성의의 결과로서 공연을 기획할 것이며 순수한 의미로서 유지일동의 기부를 받아서 공연을 갖는 것이 옳다. 이런 의미로서는 일상생활에 있어서 소인극 관계자는 모범적인 행동을 취할 것이며 직장에서나 농촌에서나 소인극에 관계있는 사람 같으면 자연 신賴와 존경을 받아 그 사람들의 계확이면 스스로 기부를 내게 되도록 인격의 정야靜冶가 있어야 될 것이다. 이것이 소인극가진 건전한 생활심리의 배양이라 할 수 있다.(藝術通信 269호. 1946년 8월 21일) [극단 ‘민예’ 연출을 유치진 씨 담당]: 극단 ‘민예’는 차회 공연으로 이광래 작 ‘피리 부는 처녀’'(4막 5장)에 착수하리라 한다. 그리고 특히 공연에는 오래 침묵 중이던 유치진씨가 연출을 담당하기로 되었다 한다.(藝術通信 269호. 1946년 8월 21일)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2)김종욱 최근 예술단체 간의 합동문제가 날로 비등되어 사계의 많은 주목을 이끌고 있던 차에 조형미술동맹에서는 18일 오후 3시부터 시내 서울신문사 회의실에서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조선미술가동맹과의 합동문제에 관하여 토의한 바 금 20일부터 개최되는 ’조형‘ ’미동‘ 양 단체의 합동미술전을 계기로 이 전람회가 끝나기 전에 정식으로 합동이 체결되도록 주선할 것을 결의하는 동시에 즉시 합동 준비위원을 선정하고 동 6시 반 폐회하였는데 이날 선정된 준비위원은 다음과 같다. 윤희순尹喜淳, 길진섭吉鎭燮, 김기창金基昶, 유석연柳錫淵, 정종여鄭鍾汝, 정현웅鄭玄雄, 최재덕崔載德, 이석성李錫成, 이완석李完錫, 서강헌徐康軒, 이 d성李ㅇ晟 (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8. 15 기념작품전]: 태백미술원에서는 단독으로 개최 예정이든 8, 15 기념향사에 관한 최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이번에 조선공예가협회와 합동으로 미술전을 지난 16일부터 1주일 간 시내 본정 2정목 태백서적공사(구 환선) 3층 화랑에서 개최중 일반에 많은 호평을 받고 있는데 그 출품작과 작자 씨명은 다음과 같다. 마술부= ‘물레방아’ (정홍거鄭洪巨), ‘시작試作’ (장우성張遇聖), , ‘양주풍경楊州風景’ (김영기金永基), ‘취가조吹哥鳥’‘(조용승曺龍承), ’배‘(장우성), ’환성歡聲‘ (박원수朴元壽), ’노도蘆渚‘(배렴裵濂), ’소‘ (이응로), ’국화國華‘ (金永基), ’의기선생義基先生‘(이유태李惟台), ’봄‘(박원수), ’나비‘ (정진철鄭鎭澈) 공예= ‘연못가의 하루’(윤봉숙尹鳳淑), ‘성기盛器’ (백태원白泰元), ‘틀 풍경’ (윤봉숙),‘ 도소합陶小盒’ (김재석金在奭), (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조선미술가동맹 이전] : 조선미술가동맹- 무교정 6번지(전 극단 ‘청포도’ 적跡)로 이전(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 문학 = [뉴욕 대학 교수 강용흘씨 귀조]: 3. 1운동의 민족적 반일투쟁을 주제로 한 ‘초당草堂’이라는 소설을 해외에서 출판하여 이제부터 우리에게 존경을 받아온 강용흘씨가 이번에ㅡ30년 만에 귀국하였다. 씨는 일제의 악정이 바야흐로 조국에 허물어들기 시작하자 표연飄然히 조국을 하직하고 1919년 만주, 중국, ‘캐나다’ 등지를 거쳐 동 22년에 미국으로 들어갔었다. 그런데 그동안 씨는 미국의 ‘허버드‘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콜럼비아‘ 대학의 동양학 강사와 ’뉴욕‘ 대학의 문과교수로 장년 조선을 위하여 활약하였으며 이동안 세계를 놀라게 한 ’춘향전‘의 소개로도 찾은 것이다. 그러한 씨가 거去 17일 인천항에 미군 정부의 중요임무를 띄우고 환국하여 작일 오전 10시 미 군정청 기자단과 회견하고 환국의 인사소감을 피력한 바 잇는데 특히 씨는 왕방한 기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나는 수개월 내지 1년 간 조국에 체재하여 전연 정치적 문제에는 ‘터치’ 않고 순수한 우리 문단 특히 미술을 외국에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의 작품으로는 ‘초당’과 ‘동양이 서양으로’가 있고 또 최근 집필을 마친 장편문학론으로 ‘20세기 문학’ 이 있다. 입경한지 불과 몇 일 되지 않아 아직 여장을 끌르는 참이니까 생소한 것뿐이어서 자세한 것은 후일 말하겠다.”(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1)김종욱 시내 모 극장에서 일어난 넌센스1 그날은 마침 8. 15 해방 1주년기념일인 관계인지 대만원을 이루었다. 영화가 끝나고 악극단이 나설 차례인데 시연의 벨이 울린 지가 20분 지나도 막은 올리지 않는다. 이쯤 되면 의례 있는 일이지만 관객석에선 휘파람 질, 손뼉, 함성, 심한 것은 욕설까지 퍼붇는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제야 막이 올랐다. 뒤집힐 듯 하던 장내도 진정 되었다. 한데 여기까지면 좋을 터인데 마침 무대에 나타난 괴상스런 여가수 때문에 또 말썽- 아무리 잘 보재도 얼굴은 괴상怪相 그것인데 몸단장도 흉물한데 발에 신은 ‘실버 슈즈’가 드디어 제2의 소란을 야기시키고야 말았다. 하기는 무대인 성장의 한 가지인 은구두가 그처럼 도화선되는 것도 싱거운 일일 터이나 "야- 저 은구두 보게. 저것 찾아 신고 나오느라고 늦었지. 구두 값이 얼굴값보다 더 비싸겠네! ” 이쯤 되고 보면 첩자帖子도 고소苦笑 외에 별도리 있었으랴. 결국 악극단 여가수 되려면 노래보다 연기보다 얼굴 편이 낳아야 팬은 용이할 건가! (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청우대] 다시 예술인의 시간관념에 대하여 일언一言 진상進上. 저명 연극인 하루 아침 열 한 시 가량 그제야 기침하여 대문 밖에 나갔더니 왠 악극 청년들이 찾아와 " 이 근방에 XX악단 선생 댁이 있다는데 혹 선생께서 아십니까?”하고 묻는 것을 "그런 부류 사람하고 난 다르오. 모르오.”하고 외면하였겠다. 악극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느냐? 없느냐? 는 잠시불문하고라도 이 저명 연극인의 일갈성으로 악극보다 연극이 우위의 예술이며 따라서 악극인보다 연극인이 진성 예술가 됨을 위선 수긍하기에 주저할 자 어찌 있으랴? 한데 그 다음 어느 연극인과 악극인의 동석하여야 할 좌석에 마침 그 일갈의 저명 연극인과 그 안짐의 악극 청년들이 공교롭게 만나게 되었는데 아침이면 11시 기침의 저명인이 정각보다 늦게 한 시간 반 만에야 출현하자 "우리는 이렇게 시간관념이 없는 부류와는 예술을 아야기할 수 없소! ” 하고 보기 좋게 일갈퇴석退席했다.고-. 이리 되고 봄에 후자는 확실히 전자의 보복적 감정이라고 하여둘 제 전자는 우월만의 일갈적 지위만을 조속히 차릴 줄 알았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시간이행에 대해선 거의 마비적으로 체면화시켰기 때문에 이 창피를 기어히 받은 것. 이 두 토막의 얘긴 예술가들이의 시간관념을 논하는데 트집 같기도 하나 요는 예술가이니까 선술집 바-에서 밤을 세워도 묵인되고 회합시간을 안 되어도 되리라는 신식체면은 없으리라. 상하를 일갈할 영광된 우월을 그야말로 이 부류들은 거꾸로 삼김이 아닐꼬.(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0)김종욱 소인극의 지휘자는 혹 도회지에서 연극에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 지도자가 되었다는 사람이라고 그 지도자가 되어서는 소인극단을 잘 돠는 방향으로 과인誇引하기가 쉽다. 소인극의 이념을 잘 알고 지도를 하면 좋으나 자기가 경험한 바 있어 이 모임에서 좌장의 노릇을 하거나 또는 소인극 단체에서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 예술지상주의적 운동을 강제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고로 이 운동의 지도자는 연극에 경험이 없더라도 일상의 생활 태도가 훌륭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사람이며 따라서 문화운동에 이해력을 가진 사람이면 이상적인 지도자다. 연출 연기 장치 등의 기술문제에 있어서도 직업극단의 배우를 초빙한다든가 일류 연출가의 강의를 듣는다든가 하는 것도 십분비판하여 전문가의 기술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소인극 운동에 필요한 기술만 취한 것임을 충분히 주의하여야만 된다.(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조선 최초의 농아극 ‘남 모르는 사상’ 상연]:극단 ‘농아극장’ 처녀공연이 정동섭鄭東燮 작 겸 연출 ‘남 모르는 사상’ 4막 5장은 드디어 작 19일부터 23일까지 5일 간 시내 장안극장에서 볼 수 있었으나 조선에서는 이번이 최초 공연인만큼 관계자 측에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영화= [금일 영화인대회]: 그간 준비 중이던 이남 조선영화인대회는 드디어 금 20일 오후 2시부터 황금정 2정목 영화동맹 회의실에서 개최한다.(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영화 검열보] 검열 월일 제명 소유자 8. 9 ‘광명의 명일’ 공보부 동 ‘백의천사’ 동 동 ‘날개 달린 재앙’ 동 동 ‘레테 작전’ 동(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극장 = [서울 시내 극장 동원표(17, 18일)] 극장 제명 입장 인원 국제 영화 ‘자유를 우리에게’ (제4일)2697,(제5일) 4633 국도 낙랑극회, 서울관현악단(제3일) 1378, (제4일) 2034 수도 극단 삼천리, 토월회 공연 (제3일) 789 (제4일)1578 중앙 극단 청춘극장 공연 (제4일)470 (제5일) 701 서울 영화 ‘해적’(제3일)1666 (제4일) 1098 장안 영화 ‘모험의 왕자’ (제3일) 400 (제4일) 599 제일 영화 ‘청춘난무’ (제4일) 423 (제5일) 650 단성 극단 민예 공연 (제4일) 370 (제5일) 604(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금주 프로] 국제 21-27 극단 황금좌 공연 국도 22- 28 영화 ‘추억의 노래’ 수도 19- 26 영화 ‘아부라함 링컨 전’ 중앙 21- 26 악극단 새별 공연 서울 19- 21 영화 ‘진주의 목거리’ 장안 19- 21 극단 농아극장 공연 제일 19- 24 영화 ‘조선의용군’ 단성 20- 26 영화 ‘밀림의 포아’(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59)김종욱 시비를 삼자니 지금쯤 너무 창피스런 일이요. 그렇다고 냄새나는 양 그대로 뚜껑을 닫아두자니 진물이 흐르도록 꾸역꾸역 색이 날 노릇! 어차피 창피함에도 그를 끄집어내자면 소위 조선 유일이오 일류가 아니라 했다간 양단 난 모 교향악단원들의 연주할 때 착복하는 의장제가 그것! 반드시 예복을 갖춘다든가 고급의장을 차리라 함이 아님은 아무리 음악에 문외한인 손자도 계산하고 고대 들 일. 와이셔츠 바람으로 팔 소매를 걷우고 나서는 용사가 있는가 하면 노타이 잠뱅이 ‘씨옷 팬츠’로 대어든 경쾌한 친구도 있으렷다. 하기는 한 편에 제법 넥타이까지 정장한 예의가禮儀家도 있고- 하여간 이리 제멋대로의 치장治裝이니까 점잖지 못한 편의 소리도 제멋대로라는 야료를 받아도 탄할 수 없는 일. 그뿐인가 요전번엔 연습피로인가 뒷켠에 앉은 - 씨 그 길죽한 놈을 안은 채 태평천하의 기지개까지 터뜨렸겠다. 자, 이렇게 되고 보니 방석을 차 던지고 나올 밖에..... 기술도 기술이려니와 위선 적으면서도 결코 적지 않은 이런 폐단부터 주간主幹선생 시정하시오.(藝術通信 267호. 1946년 8월 19일) =연극= [무대예술법 실시에 ‘연동演同’ 전면 반대 표명]: 조선 무대예술의 질적 향상과 그 보호책으로서 무대예술법이 입법화한다는 것은 빌표 이후 각계에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그동안 그 결과에 주목을 끌고 있던 중 금반 관계단체 중 연극동맹에서는 지난 14일 상임위원회에서 선출한 예술법 대책위원회에서 신중히 검토한 결과 검열제도법 등의 이유로 법안의 전면적 거부로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고 하는데 그 후 동회에서는 이서향, 박영호, 김태진, 함세덕, 이강복李康福 제씨가 대표로 관계 당국을 방문하여 동 법안의 절대반대를 구두로 진술한 바 있었다는데 동 대표 이서향씨는 그 거부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술을 위한 법령으로 그 발전 향상을 의도한 것이라면 우리는 쌍수로써 찬성할 수 있으나 이번 작성될 동 법안은 결과적으로 보아 예술행동을 제약하고 억압할 가능이 있는 것으로 동법에 제정된 심의위원회와 사전검열 등의 제도는 흡사 왜정 때의 연극문화협회의 그것과 조금도 틀림이 없다. 특히문교부가 극장 결정을 진다는 것에 있어서는 협회시대 그대로이며 더구나 검열 부흥은 언어도단이다.” 이상과 같이 동 법안의 모순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당국측에서는 어느 정도의 수정으로 재타협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당국 측에서도 함구무언이므로 추측키는 어려우나 좌우간 동법의 실시만은 거의 결정적인 것으로 今後의 귀추가 주목되는 바이다.(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소인극운동에 대한 의견서(3)]: 조선연극동맹 서기국 발표 =3. 각본선택의 방법=소인극에서는 각본의 선택이 대단 중요한 문제다. 흔히 체험하는 일인데 직장 농촌 등에서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연극 애호가들의 취미. 흥미로서 각본을 선택하는 일이 많으니 그는 대단 잘못이다. 그렇다고 교화적敎化的인 각본을 선택하는 것은 더욱이나 안 될 일이다. 그럴 때에는 직장에 있는 조합원이나 또는 가운데에서 일상생활 인격상으로나 교양交讓으로서나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이런 사람들과 같이 소인연극의 문예부를 담당하는 문예부원 수명이 모여서 각본 선정위원회같은 것을 구성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전문 극작가의 작품 중에서 적당한 것을 취하는 것도 좋으나 될 수만 있으면 공장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든가 선배 기술가들의 고심담이라든가 농촌에서는 향토의 전설 또는 향토가 낳은 애국지사의 위대한 모습이라든가를 문예부원이 직접 쓴 작품을 상연하는 것이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떨어진다손 치더라도 공장원이나 마음 사람들의 생활에 적합한 문제를 취급하는 데에서 전문 극작가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소인극의 특성의 하나이다.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58)매삭 1원씩 받아가던 라듸오 청취료가 일약 10원씩 10단도로 인상 실시되었다. 인상 이유인즉 경영유자의 곤란인데 현하의 물가고로선 금액의 고하는 불문코 ‘무리없으리라’는 것이 일반의 공론! 한데 청취료의 인상 실시 이면엔 방송 당국이 우리 연주 예술가들의 보수에도 그만침 상당한 대우개선이 응당 고려되었으리라고 믿고, 그 인상율을 타진하였더니 이것은 천만에 말씀! 청취료를 체신 당국이 하는 것이지 방송국으로선 이번 예산과는 관계 없고 따라서 연주료도 종전대로 실시 중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체 우리 예술가들의 방송료는 얼마나 들어왔는가? 그것을 여기에 소개하면 아래와 같은 것이다. # 방송극= 원작료 300원, 연출료 2백원, 출영 매인당 100원 # 강연= 취미, 가정, 어린이 시간 각 1회에 80원 # 독창= 100원 # 야담= 150원 물론 이상은 최고율인데 배우 한 사람이 일야 도보徒步출연에 2백원, 전차권 요금으로 출연하는 것도 기특하거니와 독창하는 예술가가 야담보담 싸게 대우 받고 출연한다는 것도 또한 가상할 노릇이다. 참고 삼아 이승만 박사의 강연 방송엔 얼마씩 드리느냐고 물었던 바 군정청에서 편입하는 프로는 방송국에선 지불치 않는다고 말한다. (藝術通信 267호. 1946년 8월 19일) =극장= [서울 시내 극장 동원표(16일)] 극장 제명 입장 인원 국제 영화 ‘자유를 우리에게’ (3일) 3942 국도 낙랑극회, 서울관현악단(2일) 1378 수도 극단 삼천리, 토월회 (2일) 585 중앙 극단 청춘극장 공연((3일) 501 서울 영화 ‘해적’ (2일) 1201 장안 영화 ‘모험의 왕자’ (1일) 572 제일 영화 ‘청춘난무’ (3일) 520 단성 극단 민예 공연 (3일) 509(藝術通信 267호. 1946년 8월 19일) [금주 프로] 국제 21- 27 극단 황금좌 공연 국도 22- 28 영화 ‘추억의 노래’ 수도 19- 26 영화 ‘아브라함 링컨’ 중앙 21- 27 악극단 새별 공연 서울 19- 24 영화 ‘진주의 목걸이’ 장안 19- 24 농아극장 공연 제일 19- 24 영화 ‘조선의용군’ 단성 20- 26 영화 ‘밀림의 포아砲兒’ (藝術通信 267호. 1946년 8월 19일) [극장협회가 중심으로 경기도 전도협회를 발기, 금월 중에 발기대회 소집] 한성극장협회에서는 목하 문교 당국에서 기초 작성 중에 있는 무대 예술법 등에 대처하여 도내 극장 운영에 있어서의 문화적 수준을 발전시키며 아울러 극장인의 상호친목을 도모할 것을 목표로 ‘경기도 극장협회’의 창립을 기도하고 있다. 즉 지난 16일 오전 10시부터 동협회 이사회는 동도협회 창립발기안을 가결하는 동시에 협회와는 전혀 분리하여 그 기성준비에 착수코자 위선 현 동 협회 이사 5씨 외 김두수金斗洙, 이영재李永宰, 안병기安炳奇, 김동열金東烈, 씨 등 준비위원을 선정하였다 한다. 그런데 정식 발기인대회는 지방연락이 되는대로 월중에 소집할 터이라고 하는데 동회의 발기인회를 대표하여 현 한성극장 사무국장 김두수씨는 그 포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극장인들은 적산 관리인 즉 대가조합貸家組合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야말로 문화의 교실을 지키는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여야 할 것으로 첫째, 앞으로는 각 극장에 개개로 상당한 성격적 치수를 가져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재 ‘홍도야 울지마라’ 등은 서울 치고 어느 극장에든 올리는데 그런 것도 필요하다면 필요하고 극장에 영화면 영화, 좀 수준이 높으면 높은 데로 울리게 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각 극단이 연명책으로 실제로 문이 없는 고리로 단행을 하는 예가 있는데 이런 일로 극장 측에선 우금껏 등한시 혹은 오불관언의 태도로 있었는데 앞으로는 도 단위의 강력한 협회가 생기면 거기에서 부수 사업으로 그런 자금융자 혹은 기타의 알선사업 등이 실시 될 줄로 안다.(藝術通信 267호. 1946년 8월 19일)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57)김종욱 조선 최초의 시험으로 예술진흥회가 기획한 음악 키노드라마 ‘황포강’을 그 후 박시춘음악단 전원의 출연으로 청구영화사에서 제작 중이던 바 이번에 드디어 인천 로케로 그 촬영을 완료하고 방금 현상 중이라고 하는데 일반 공개는 오는 9월 하순경으로 벌써부터 그 성과가 크게 기대된다고 한다. 그 뒷 스탭과 출연자는 아래와 같다. 각본 백운영白雲英 연출 신천申泉 촬영 고인형高仁亨 음악 박시춘 출연자 송달협宋達協 김용대金龍大 이수룡李秀龍 이인권李寅權 홍청자洪淸子 외 전원(藝術通信 267호. 1946년 8월 19일) [‘똘똘이’ 효과를 이상만李相萬씨 담당 ] : 남일영화사 작품 ‘똘똘이의 모험’이 방금 광희정에 있는 조선영화사 분실에서 편집 중에 있다 함은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이번에 그 효과에는 방송국 근무 중인 라듸오 드라마의 효과 담당 이상만씨가 담당키로 되었다 한다. (藝術通信 267호. 1946년 8월 19일) [영화 검열보] 검열월일 제명 소유자 8. 9 ‘토스카니니’ 공보부 동 미국영화 제7권 동 동 ‘강철가鋼鐵街’ 동 동 ‘인력人力과 토지’ 동 동 ‘레테 작전’ 동 해방 1년 사진전, 16일부터 1개월 간 자유신문사 사진부에서는 벌써부터 해방 1년 동안의 사진을 래 일반으로부터 모집하고 있던 바 금번 그 응모 작품 중에서 우수한 80여 점과 동시에 기록 사진 안 백여 점을 갖고 일작 16일부터 서울 만물점 갤러리에서 9월 15일까지의 1개월 간 장기전을 개최한다고 한다. 그런데 특히 회기 중 그날의 시사속보 사진도 진열한다고. ’(藝術通信 267호. 1946년 8월 19일) =연극 = [소인극운동에 대한 의견서(2)]= 조선연극동맹 서기국 발표 1. 조직 소인극운동은 그 직역職域 또는 지역의 전체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로서는 그 직장에 있는 노동조합이나 농촌에서는 농민조합이나 또는 문화단체 같은 단체와 연락을 가지는 것이 옳으며 굿을 좋아하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XX극단, ㅇㅇ극단 하는 조직은 절대로 피할 것이며 어디까지든지 생활의 강화와 혁신을 위한 운동의 조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연 시의 태세를 본다면, 공연 총지휘자- 관객 동원부= 회장 설비계, 장내 정리계, 관객 동원계, 조사계 회계 연극 지도자= 무대부, 문예부- 연구계, 각본계 이상과 같으나 이것은 꼭 이래야만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 직역 또는 그 지역에 따라 소인극 운동의 이념에 충실한 조직을 고안考案함이 좋을 것이다. 2. 활동방법 연극을 위한 연극이 아니며 반 직업화를 피하는 의미로 그 직장의 연중행사 때나 또는 특별기념일 또는 그 지역의 특별한 명절을 이용해서 다 함께 유흥할 수 있는 날을 택하여서 년 2회 내지 3회가 적당하다. 여기에 주의할 것은 문예부의 연구계와 관객 동원부의 조사계 이 두 부서의 활동이다. 이계爾係에서는 밀접한 연락을 가지고 연구계는 공연 중 관중석의 공기와 무대에서 오는 감명이 어떻게 반영하는가를 연구하여 각본 선택의 자료로 하며 조사계는 그 공연 전체가 그 직장 또는 마을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조사해서 연구계에 상담하여 다음 공연의 기획에 참고가 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후는 공연 태세를 해제할 것이며 문화부= 문예부= 교육부와 같은 단순한 조직으로 하되 그 직장 그 지역의 문화활동의 일환으로서 문화운동에 참가하여야 한다. 그리고 당시 활동에서 주의할 것은 지방순연을 하고 있는 직업극단에서 조연을 부탁 받을 때는 그 극단의 내용을 주지하는 바 있더라도 가급적으로 찬조는 피할 것이며 소인극 콩쿨 같은 기획에도 우승기 또는 상금에 유혹되어 용이하게 참가할 것을 피함이 좋다. 특히 이런 소인극운동은 일시적인 운동에 끊치는 수가 많으나 그런 활동은 틀리는 것이다. 꾸준히 장구한 활동 중에 결실하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藝術通信 267호. 1946년 8월 19일) [‘참새의 춤’ -낙수첩-] : 악극 여우 박 모는 일찍이 동서 중의 본부인과 헤어지기까지 하고 그이와 초연의 꽃을 피어 한동안 항간에 박람회 구경 다녀온 박첨지 진담珍談같은 수소문을 퍼eM리더니 그이 귀국한 이래는 한숨(눈물 아닌)의 부르스에 하염없었는데 또 최근엔 그이로부터 정식 결혼 차 찾아온다는 소식이 날아와서 참새처럼 좋아한다고- 하기는 참새란 백세까지 춤추는 것이니까.(藝術通信 267호. 1946년 8월 19일)
-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56)김종욱 조선 제일 호화극장 물경! 이화고녀 재단의 쾌거 서울 정동 양인지구에 대 극장이 건립된다. 색다른 소문도 없이 실시되려는 이 뉴스 더욱 그 건립자가 이화고녀 유리재단有履財團이라 함에 한층 세간을 놀라게 하며 주목되게 할 바 있는 것이다. 즉 소련영사관보다는 윗 편인 두 외국 공관사이에는 불출세의 공지 1만 5천 평이 오늘의 이 획기적 계획들 가진 주인을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지는 해방 전 구 이왕직의 소유였던 것을 경성일보가 소위 출판국 별관을그 근처에 차리면서 이 토지를 매수하였던 사실이 있었는데 금번 그 경성일보가 재산을 정리하면서 특히 군정청의 양해를 얻어 교육기관인 이화고녀 유리재단에 정식 불하케 되었고 동 재단은 여기에 우리나라 제일의 예술전당으로 대 극장을 건립하여 거기에서의 수익으로 학교를 유지하자는 계획을 급기야 세워 결정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동교 학부형 이사회에선 지난 주일에도 그 실천을 위한 자재 설계 입장에 대하여 엄밀한 연구회의를 가진 바 있다는 바 어쨌든 이 계획은 천하의 찬사와 지지를 받으며 그 성공에 축복받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인데 과거 해방 전만 하여도 좋거나 글커나 우리 예술가의 자녀라 하면 무조건으로 입학을 우선 취급한다는 숨은 미담이 있었던 동교이니 만침 이 계획 또한 우연할 바 아니라는 더붙이기 공론公論-(藝術通信 266호. 1946년 8월 17일) [극장 매점론賣店論- 낙수첩-] 일제 시대엔 극장도 왜놈의 제2, 제3호 첩녀妾女가 그 매점에 고양이처럼 도사리고 앉아있는 모양인데 설마 이즈음이야 그럴 리 없겠지만 개중 모 대 극장 같은 데서는 이 매점을 백주白晝 모리수단 기관으로 이용하는 일이 있는 모양- 목마른 손님을 위하여 장내에서 서비스 한다는 의미보다 시중가의 갑절 이상 모리하는데 취미를 느끼는 일 그보담도 엊그제는 서적의 의탁판매를 부탁하고 3할의 수수료를 준다 했더니 이것도 사이다나 낙지 쪽으로 알았던지 5할 아니면 안 받는다고 거절, 그 서적가 15원에 7원 50전을 모리할 생각이 고위들에게 구내매점을 경영시키는 지배인씨(혹은 지배인 자신일지도 모르나) 하니까 극장은 문화인에게라고 하잖는가? 만약 지배인의 소신 아니거든 등하불명의 우愚를 씻을 것- 종로 S출판사 기寄-(투서 환영, 단 주소 성명 명기할 것. 지상 익명匿名은 자유 藝術通信 266호. 1946년 8월 17일) [청우대] 8. 15 벌서 해방 1주년이다. 회고컨대 작년 이날엔 즐거워서 울음 터진 우리 환희의 눈물과 함께 옷 적시어도 좋은 비가 내리었다. 적시어도 좋을 배 아니다. 그것 저것 정신 차릴 바 없이 그저 행렬 속에서 지내었다. 그러면서도 이날이 꿈 아닌가 싶어서 제 살을 꼬집어보던 일! 하나 1년은 어언 지났다. 해방과 독립은 꼭 같이 오는 다를 바 없는 의미인줄 알았더니 앞으로도 알 수 없는 아주 다른 의미인 것이었음에랴. 오늘 그 옛날은 그렇게 친하던 우인과 갈라져서(그는 종일 집에서 낮잠 잔다 했다.)저 행렬에 끼어 폭양에 거리를 겄드라니 감격에 치우쳐서 울면서 만세부르던 작년과는 이리도 의미가 다르랴. 서글프고 어색한 심사! 시인 모씨는 3. 1 기념일에 벌써 ‘봄이 오기 전에 3월 1일이 먼저 왔다.’ 고 노래하였던 것을 시방 새삼스럽게 읊어본다. 그렇다. 독립이 오기 전 아직 우리는 행렬 속에 있다. 오늘의 이 행렬은 우리 다 같이 싸움터로 나가는 행진이다. 우리 자주인민의 정부를 세우기 위한- 그리고 우리 예술가는 인민 속에 진정한 예술의 뿌리를 박기 위한 맹서의 만세를 웨쳐야 할 행렬! (藝術通信 266호. 1946년 8월 17일)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토속민요의 힘, ‘일노래, 삶의 노래’
- 2공연예술로 하나가 되는 '더원아트코리아' 최재학 대표를 만나다
- 3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일노래, 삶의 노래' 오는 23일부터
- 4(34) <br> 노동은의 ‘잘못된 조건’ 둘, ‘교묘한 조작’
- 5유인촌 문체부 장관, '국제문화정책 추진전략' 발표
- 6'새 국악진흥법' 시행령·시행규칙 공청회 31일 개최
- 7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94)<br>북해도아리랑
- 8문화체육관광부, 지역 예술단체 22개 선정
- 9김연자 "노래 좋아 달려온 50년…88 폐막식 하늘 지금도 생각나"
- 10스페인의 꽃, '파두&플라멩코' 부산에서 만나다, 선착순 200명 예약